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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주역]어린아이처럼 깨우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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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9-09-29 15:47 조회1,3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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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처럼 깨우쳐라


신혜정(감이당 금요대중지성)

 

山水蒙 

蒙 亨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初筮 再三瀆 瀆不 利貞.

初六 發蒙 利用刑人 用桎梏 以往吝.

九二 包蒙 吉 納婦 吉 子克家.

六三 勿用取女 見金夫 不有躬 无攸利.

六四 困蒙 吝.

六五 童蒙 吉.

上九 擊蒙 不利爲寇 利禦寇.

 

올해 초, 감이당 도반들과 함백에서 열리는 캠프에 참가했었다. 거기서 자신의 공부계획과 1년 동안 읽을 텍스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역 점(占)을 치게 됐다. 산가지를 이용해서 주역의 효를 뽑고, 그걸 자기가 가졌던 질문의 답, 즉 점괘로 읽어내는 것이다. 일 년을 시작하는 시점이니 ‘올 한 해는 어떤 마음으로 공부를 해야 될까요?’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어리석음과 어린아이’를 상징하는 ‘몽(蒙)괘’가 나온 거다. 그때는 단순히 ‘올해는 어리석음을 깨는 공부를 해야겠다.’라고만 생각했다. 헌데 이번에 주역을 다시 읽으면서 몽괘에서 말하는 어리석음이란 게 구체적으로 뭔지, 그걸 어떻게 하면 깰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먼저, 몽괘의 상(象)을 살펴보면 물이 산에 가로막혀 흐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무언가에 가로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갑갑한 형국인 것이다. 그런데도 몽괘에서는 이런 상황이 형통 하단다.(蒙 亨) 왜일까? 그 이유에 대해 정이천은 “몽은 어리석음을 깨우쳐 계몽할 수 있는 이치가 있으니 형통하다.”고 말한다. 어리석음을 깨우쳐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이 말을 새겨보니, 깨닫기 위해선 먼저 자신이 어리석다는 걸 인정하는 게 관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蒙이라는 글자는 “사람의 머리에 뭔가를 덮어씌워 눈을 가린다.”라는 뜻. 몽괘의 어리석음이란 결국 자신만의 생각의 감옥에 갇혀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똑같은 생각, 똑같은 방식만 반복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공부를 하면서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도 변화가 없을 때. 무언가에 가로막혀 불통이라고 느껴질 때. 내가 가진 전제를 의심하며 다른 방향을 사유하기보다 오히려 자꾸 익숙한 방법이나 이미 알고 있는 편한 방식으로 치우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걸 인정하고 벗어나기가 두렵고 너무 힘들어서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니 계속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한 자리에서 맴돌 수밖에. 그렇다면 몽괘에서는 어떻게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육오효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먼저, 육오효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쿨하게 인정하는 자이다. 높은 위치에 있지만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스승인 구이효를 찾아서 내려간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려면 혼자는 곤란하다.(困蒙 吝) 자신의 이목을 가리고 있는 견고한 틀을 흔들어서 깨 줄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육이효는 스승의 사회적 지위나 위치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가 어떤 성품과 비전을 가진 자인지가 중요할 뿐. 그리고 한 번 뜻을 정하면 사사로운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스승을 믿고 따른다.

헌데 몽괘에서는 왜 굳이 육오효를 동몽(童蒙)에다 비유를 했을까? 왜 어리석은 어린아이가 길하다고 하는 걸까? 그것은 육오효가 가진 신체성. 어떤 자의식이나 전제 없이 누구와도 접속해서 배울 수 있는 어린 아이와 같은 열린 신체. 유연하고 자유로워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태도에 주목하라는 것 같다. 몽괘에서 말하는 동몽의 길함이란 결국 이런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길은 육오효가 보여준 것처럼 반드시 자신의 힘으로 열어가야만 한다.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다. 스승이나 도반도 스스로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깨달음을 간절히 구할 때 그 손을 잡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했을 때 비로소 나를 가리고 있던 어리석음의 장막을 거둘 수 있다.

처음 감이당에서 공부를 시작했을 땐 이 ‘신체성’이라는 말이 마음에 크게 와 닿지가 않았다. 신체가 열리고 바뀌어야 텍스트도 새롭게 읽히고 존재가 변화된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생각하는 공부는 이성적으로 지식을 습득하는 차원이지 몸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뭔가 막힐 때면 텍스트의 개념을 정리하고 요약하는 데 더 매달렸다. 이런 방법으로 공부를 하니 진척이 없었던 거다. 책이든 사람이든 제대로 접속하려면 내가 가진 전제나 분별을 내려놓고 눈과 귀를 열어야 한다. 열린 신체라는 게 결코 은유가 아니다.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세상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이치를 터득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동몽의 길함”을 머리로만 인식하는 게 아니라 체화한다는 게 뭔지. “어린아이처럼 구하고 배운다.”게 어떤 것인지를 깊이 고민해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감이당과 문이정은 나를 끊임없이 수련하는 도량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텍스트와 여러 존재들을 만나려면 신체가 부딪치고 서로에게 깊이 개입해야하기 때문이다. 헌데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장에서 꾸준히 연습하고 훈련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어떤 대상과도 섞일 수 있는 가볍고 열린 신체를 실험하고 수련하는 것.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내 삶의 윤리를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어리석음을 벗어나서 깨달음으로 가는 진정한 공부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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