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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참을 수 없는 도주의 절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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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9-09-29 15:48 조회1,29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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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도주의 절박함


한은경(읽생 철학학교)

‘안티 오이디푸스’라면 자신이 좀 있었다. 가족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지 않은 나, 자식에 대해 애면글면하지 않는 나,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 명품과는 동떨어져 살고 있는 나에 대해 이 정도면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면이 있었다. 그러다 지난 겨울 딸아이의 대학 입시를 겪으면서 자본주의적 욕망에서 조금은 비껴 있다고 믿었던 내 자부심에 스크래치가 났다.

딸은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전혀 하지 않다가 고등학교에 가서 스스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나는 딸에게 늘 지금 노력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니 대학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공부하지 말라는 우아한 격려만 했다. 그런데 딸아이가 명문대에 아깝게 떨어지고 그보다 못한 대학에 합격하자, 나도 모르게 속상하고 아쉬운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딸의 대학 합격이 별로 기쁘지가 않았다. 나한테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고 싶은 욕심이 이리 시퍼렇게 살아있었나 당황스러웠다. 딸의 입시 결과를 받아들이는 내 감정은 자본주의적 흐름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나의 반응을 나답지 않은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찬찬히 보니 평소 내가 살아가는 방식들이 모두 이와 다르지 않았다. 현실에서 작동하고 있는 ‘나’와 내가 형성해 놓은 ‘나’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명품, 쇼핑 등 자본주의 상품 경제와 먼 듯 살아 왔지만, 물건의 가치를 판단할 때 그 물건의 가격이 늘 중요한 기준이었다. 집을 사지 않는 마음 한 편에는 부동산 가격의 오르내림에 일희일비하고 싶지 않은 불안함이 있었다. 그동안 스스로마저도 잘 속이고 감추고 있던 것이 자식 일에서 날것 그대로 드러났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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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오이디푸스』는 이런 나를 가치 있는 신념을 가졌다는 자기만족에 취해 있는 사람이라고 진단한다. 이런 사람들은 반자본주의적 삶을 옳고 멋진 거라 정해 놓고 있는데, 이 정답지는 대개 지식을 통해 터득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정답지를 가진 것만으로 자신이 자본주의로부터 탈영토화하고 있다고, 도주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실제 삶과는 무관한 착각은 기만으로 이어진다. 자본주의처럼 속물스러운 양식과는 잘 지낼 수가 없어 애써 다른 삶의 방식을 찾고 있는 사람인 양 스스로를 규정한다. 또한 자신을 근면, 알뜰, 자존감, 교양 등 도덕적 가치로 포장도 잘 한다.

결국 나의 욕망과 무의식은 한 치의 벗어남도 없이 자본주의가 닦아 놓은 돈, 시장, 가족이라는 길 위에 있었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내가 굳이 적극적인 도주를 할 필요가 없는 사람, 자본주의 사회체 안에서 자본주의에 걸맞은 이미지를 만들면서 그럭저럭 잘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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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오이디푸스』를 통해 나 자신에게 가장 실망스러웠던 게 바로 이 ‘잘살고 있음’이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계급과 이해관계, 자아 증식, 반생산만이 넘쳐나는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도주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안티 오이디푸스』를 썼다. 그런 절박함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식이 다니는 대학 이름을 가져와 내 그럴듯한 자아를 꾸미는데 쓰고자 하는 이 찌질함에 나는 어떻게 고작 요만큼의 부끄러움밖에는 느끼지 못할까. 그럭저럭 잘 살고 있으니 나는 앞으로도 그냥 이대로 살게 되는 건가라는 답답함, 자식이 대학 갈 때 겪었던 좌절과 부끄러움을 자식이 취직할 때, 자식이 결혼할 때 반복해서 겪고 또 대충 무마하고 사는 건가라는 한심함, 지금의 나는 아직 여기까지다.

조금의 부끄러움, 한심함도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기 전까지는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다. 사이비 도주를 하면서 얻는 자족과는 반대일 수 있는 이 답답함이 나에게는 오히려 꽉 막힌 곳에 뚫린 작은 틈처럼 느껴졌다. 거창한 절박함이 아니다. 당연하고 익숙해서 인식조차 하지 않던 일에 ‘이건 아니다’라고 제동을 거는 순간들이 모여 이루는 그런 절박함이다. 『안티 오이디푸스』를 통해 가지게 된 내 공부의 중요한 과제는 그래서 ‘절박함 살려 내기’이다. 내 자식이 명문대에 가는 것을 나도 모르게 당연시 했던 거처럼, 지금도 ‘나라면, 내 자식이라면, 내 가족이라면……’으로 시작하는 많은 전제들이 내 일상에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를 안내자 삼아 그 전제들의 허구성을 알아차리고, 거기서부터 도주선의 실마리를 더듬더듬 찾아가 보고자 한다.





댓글목록

猫冊님의 댓글

猫冊 작성일

안티오이디푸스는 아직 안 읽어봤습니다만, 저는 자본주의 한 복판에서 밥을 벌어먹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력의 욕구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왜곡되는 거 같다는 생각을 하는 요즘입니다
나의 생존과 안녕을 위해 발휘해야 하는 힘을 자본에서 빌려다 쓰는 게 가장 쉬운 세상이니까요
손쉽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반성해 봅니다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다하는 것보다 돈과 스펙으로 호감을 얻는 게 손 쉽고 빠르잖아요
그런데... 쉽게 살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함정에 빠지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