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주(금요대중지성)
山地 剝 ䷖
剝, 不利有攸往.
初六, 剝牀以足, 蔑貞, 凶.
六二, 剝牀以辨, 蔑貞, 凶.
六三, 剝之无咎.
六四, 剝牀以膚, 凶.
六五, 貫魚, 以宮人寵, 无不利.
上九, 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글쓰기로 수련하기’는 감이당의 명실상부한 수행의 한 방법이다. 글쓰기 발표 현장은 나에게 늘 번뇌의 시간을 그대로 통과해야만 하는 고행의 장이었다. 텍스트를 분석하여 주제를 찾고, 산만한 생각들을 겨우 정리한 뒤 글을 발표하면, 스승과 도반들은 헛다리로 짚은 내용의 문제점들을 예리한 코멘트로 지적해 주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뒤이어 찾아오는 것은 고마움보다는 폭발적으로 올라오는 자의식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자책감과 열등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미사여구를 동원해 포장했지만 결국 자신의 실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 글! 글쓰기 발표 현장은 지금까지 어설프게 꾸며왔던 삶의 파편들이 온전히 까발려지는 장이었다. 하지만 까발려지는 그 순간에 자신을 직시해야지만 문제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었고 글을 다시 수정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완성된 사유의 집결체를 글로 표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번뇌의 덩어리를 온몸으로 통과하며 지금까지 꾸며왔던 것을 벗겨내고 깎아내는 ‘겪음’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겪음’이 수행이 아니고 무엇일까?
이러한 글쓰기 수행과정을 말해주는 주역의 괘가 있다. 바로 산지박 괘이다. 박(剝)은 꾸몄던 것은 반드시 깎이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꾸밈의 도를 알려주는 비괘 다음에 오는 괘가 박괘이다. ‘빛 좋은 개살구’, 꾸밈이 지나쳤던 자의 허물이 벗겨지는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군자는 산지박 괘를 보고 소식영허(消息盈虛), 즉, 소멸하고 자라나며 가득 차고 비는 자연의 법칙을 알게 된다고 한다. 군자는 이러한 박괘의 이치를 받아들여 일을 처리하는 근거로 삼았다고 하지만, 소인의 입장에서는 깎임을 겪어 나가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소인들은 말한다. 박괘는 가장 흉한 괘라고. 그만큼 벗김을 당하는 것이 어렵다는 뜻일게다.
박괘의 괘상을 보자면 초효부터 오효까지 모두 음이고 마지막 상구효만이 양이다. 괘상이 보여 주는 것은 가장 편하게 몸을 누일 수 있는 침상 다리부터 쭉 깎여 올라가다가 피부까지 벗겨지는 흉함을 당하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양인 상구효는 어떻게 될까? 효사는 이러하다. 큰 과일은 먹지 않음이니 군자는 수레를 얻고 소인은 집을 허문다.(上九, 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이 말은 몸이 의탁했던 모든 것이 없어지고 살갗까지 벗겨진 최악의 상황까지 갔는데도, 그래도, 남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바로 마지막 하나 남은 양, 큰 과일인 석과(碩果)이다. 석과는 먹지 않고 남겨 둔 과일이다. 왜 남겨 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