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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주역]어느 상담실에서의 짧은 만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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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9-10-18 23:59 조회1,4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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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상담실에서의 짧은 만남들




장현숙(금요대중지성)

 

天風 姤 ䷫

姤, 女壯, 勿用取女.

初六, 繫于金柅, 貞吉, 有攸往, 見凶, 羸豕孚蹢躅.

九二包有魚无咎不利賓.

九三, 臀无膚, 其行次, 厲, 无大咎.

九四, 包无魚, 起凶.

九五, 以杞包瓜, 含章, 有隕自天.

上九, 姤其角, 吝, 无咎.

 

천풍구(天風姤)는 만남에 대한 괘이다. 하늘을 상징하는 건(乾)괘가 위에 있고 바람을 상징하는 손(巽)괘가 아래에 있어 바람이 하늘 아래에서 부는 형상이다. 바람이 불어 접촉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만물과 만나는 모습이라 하여 구(姤)라 한다.

만남에 대한 괘이다 보니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수많은 만남들이 떠올랐다. 그 중 학생상담자원봉사를 하며 만난 아이들을 잊지 못한다. 법원에서 교육명령을 받은 아이들이었다. 1주일에 한번 두 시간씩 상담을 했는데, 타로를 펼쳐 살아온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를 하며 자신들이 한 행동을 돌아보게 하는 내용이었다. 한창 성장기의 아이들인지라 덩치도 덩치였지만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의 끔찍함에 비해 일말의 죄책감도 찾아볼 수 해맑은 모습에 너무 놀랐다. 그 중 몇 번씩 법원을 들락거리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초범도 많았다. 초범의 아이를 개인 상담해보면 그 안타까운 사연에 누가 이 아이들을 탓할 수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봐주는 어른도 없고, 있다하더라도 그 환경이 만만치 않았다. 작은 실수로 한번 법원에 오기 시작하면 자기들끼리 무리를 형성하면서 다음 범죄에 노출되기 쉬운 상황이 되었다. 그걸 막고, 아이들을 다시 학교와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상담의 목표였다.

하지만 1주일 한 번의 시간에 비해 아이들이 처한 환경은 너무 열악했다. 그래서 가끔은 이 한 번의 상담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때 상담소 직원분이 내게 해준 말이 생각난다. “좋은 부모에 대한 기억을 가진 아이는 평생을 버틸 수 있고, 좋은 어른에 대한 기억을 가진 아이는 10년을 버틸 수 있어요. 아이들의 환경은 너무 열악해요, 성인이 되어도 그 고리를 끊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세상엔 자신들을 걱정하며 지켜봐주는 어른들도 있다는 것을 안다면 아이가 다른 나쁜 길로 빠지는 걸 지연시킬 수는 있지요. 우리는 그저 그 역할을 하는 거예요.”

천풍구는 하나의 음이 이제 막 생겨나 여러 양들을 만나는 모습이다. 정이천은 “구괘는 이제 막 나아가는 음효가 점차로 건장하게 자라서 양에 대적하는 상황이니, 취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천풍구에서 하나의 음(초육)은 지금은 그 세력이 매우 약하지만 점차로 자라날 가능성이 있는 음유한 마음을 상징한다. 음은 처음 자라나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마음이 결정된다. 아직은 약하지만 점점 자라날 가능성이 있고, 중정(中正)하지 않은 자리에 있기에 “나약한 돼지의 속마음은 날뛰고 싶어 한다(羸豕孚蹢躅)”는 말처럼, 그 마음을 매어놓지 못하면 어느새 삿된 마음으로 전체의 만남을 불손하게 물들인다. 이는 법원의 교육명령을 받은 아이들의 상황을 말하는 듯하다. 보호해줄 어른이 없는 상황에 주변의 유혹은 많으니 그 마음을 붙들어 매어놓기에 힘이 부친다. 구이(九二)는 그런 초육을 꾸러미에 물고기를 잡아 담듯(包有魚 無咎)이 만나는 사람이다. 꾸러미에 물고기를 잡아 담듯이 만난다는 것은 어떤 만남일까? 정이천은 오직 한 사람에게 집중하여 진실한 마음을 굳게 기르도록 제어하는 만남이라고 한다. 초육은 구사와 정응하기 때문에 마음이 자꾸 다른 곳으로 향하기 쉽다(不利賓). 그래서 구이는 초육으로부터 진실한 마음을 얻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른 곳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한 사람에게 집중해 진실한 마음을 나누는 것. 이것이 초육에 대한 구이의 만남이다.

법원 교육명령을 받은 아이들과의 만남에서 나는 천풍구 구이의 역할이었다. 어쩌다 법원 교육명령까지 받는 상황이 되었지만, 더 이상 다른 삿된 만남에 유혹되지 않고 진실하게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그 마음을 붙들어 매도록 하는 것. 사실 내가 그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는 자신 없다. 굳이 변명하자면, 일주일에 한번 두 시간은 너무 짧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나와의 짧은 만남 후 그 아이들은 또 다른 많은 천풍구의 구이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 구이들의 작은 시간들이 합해져 나약한 돼지의 날뛰고 싶은 마음은 모진 세파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단단하게 자랐을지도 모른다. 짧은 만남들이지만 그 만남의 힘을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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