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란(감이당 금요대중지성)
䷻ 水澤節
節 亨 苦節 不可貞.
初九 不出戶庭 无咎.
九二 不出門庭 凶.
六三 不節若 則嗟若 无咎.
六四 安節 亨.
九五 甘節 吉 往有尙.
上六 苦節 貞凶 悔亡.
중년이 되니 나잇살이라는 게 뭔지 실감난다. 처음엔 억울했다. 예전보다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절로 살이 붙다니!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먹긴 먹었다. 밥 말고 나이. 그래, 이제 인생의 가을이다. 때에 따라 해야 할 일이 다른 법인데, 예전 같기를 바라는 건 어리석다. 가을 나무는 잎을 떨군다. 남길 걸 남기고 버릴 걸 버리지 않으면 겨울에 다 얼어죽기 때문이다. 나도 겨울이 오기 전 군살을 덜어내야겠다.
이렇게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보니 주역의 절(節)괘가 눈에 들어왔다. 살, 아니 뼈를 깎는 각고(刻苦)의 고통이 절로 떠오르는 절 괘. 그런데 절 괘의 풍경은 예상외로 고요하고 아름답다. 수택절(水澤節), 물(수)이 가득찬 연못(택). 절제란 유혹을 참고 고통을 이겨내는 일이라 여겼는데. 뜻밖에 만난 고요한 풍경 앞에서 어리둥절해하다 괘사를 읽어봤다. “절은 형하다(節,亨).” 절제가 형하다니? 이상하다. 절이라는 글자가 이미 마디 절(節)이다. 쪽쪽 뻗어 자라는 대나무도 마디는 굵게 불거진다. 울퉁불퉁하고 딱딱한게 마디다. 마디처럼 선을 딱 긋고 분별하는 것이 절제다. 형(亨)이란 두루 통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절제란 형통하다고 하는 것일까?
가만 생각해보니, 연못의 고요한 아름다움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부족하면 받아들이고 넘치면 흘려보내면서 쉼 없는 조절이 있었던 거다. 이런 조절이 만사를 형통하게 한다. 주역에서 우리에게 설명하고자 하는 절제란 조절력이지 뼈를 깎고 허벅지를 참는 인고(忍苦)가 아니다. 이어지는 다음 괘사를 보자. “괴로운 절제로는 올바를 수가 없다(苦節 不可貞).” 오호라, 바이올린의 현도 당기기만 하면 끊어지는 법이고 무리한 다이어트는 폭식을 불러온다. 절 괘는 긴장과 반성으로 점철된 ‘노오력’에 반대한다. 그렇게 해서 잠시는 효과를 거둘지 몰라도 지속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괴롭지 않아도 된다니, 아니 괴로우면 안된다니 이건 굿 뉴스다. 한데 그럼 어떻게 조절해야 한다는 걸까? 절 괘가 제시하는 최고의 절제는 쓰디쓴 “고절(苦節)”이 아니라 감미로운 “감절(甘節)”이다. “감미로운 절제라 길하고, 가면 기쁨이 있으리라(九五 甘節 吉 往有尙)”. 감미로운 절제라니! 이건 가히 절제의 패러독스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