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제까지는 겸손이라고 하면 잘난 체하며 나서지 않고 스스로를 낮추는 언행을 떠올렸지 내 것을 나누고 덜어내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을 낮추는 것과 물적인 걸 내놓는다는 건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몇 년 전 한 도반이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샘은 어떤 일이 주어지면 왜 맨날 저는 못해요 라는 말부터 먼저 해요. 결국은 잘 할 거면서,” 그 때는 그게 겸손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이미지를 지키는 교양 수준, 우아한 태도 차원에서 겸손을 이해했던 거다. 나를 비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키려 했던 것. 그럼 겸괘에서 말하는 진정한 겸손은 어떤 걸까? 그 답은 육이효의 “명겸(鳴謙)“이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다. 명검이란 겉으로만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와 목소리와 얼굴에 또 행동에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 어떻게 이런 태도가 가능한 것일까? 그러려면 무엇보다 먼저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주적 차원에서 본다면 유무형의 자원은 정해져 있다. 그러니 재물이든 재능이든 명예든 내가 많이 가졌다는 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몫이 그만큼 적어졌다는 거고 그 말은 결국 다른 이들의 걸 빼앗아 내 것을 채웠다는 의미도 된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여러 인연조건들이 얽혀 만들어 진 결과라는 것. 이런 감각이 전제되어 있다면 나를 낮추고 내가 가진 걸 나누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렇게 하면 일겸사익(一兼四益). “하늘도 땅도 귀신도 사람도 덜어내서 나눈 부분을 복으로 채워준”다니. 아!! 그래서 겸괘의 여섯 효가 다 길한 거였구나. 나누고 비웠더니 복(福)으로 돌아와 채워지는 선순환.^^
헌데 겸괘의 상육효를 보면 같은 명겸이 또 등장한다.(鳴謙 利用行師 征邑國.) 이건 뭐지? 왜 겸괘의 마지막에 왜 다시 명겸이 나오는 걸까? 상육효에서 명겸은 육이효와는 다른 상황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 겸손이 지나쳐 오히려 오만으로 흐를 수 있음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여기서 읍국을 친다는 건 사사로운 마음을 비우고 스스로 수양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 때문에 진정한 겸손이란 결국 세상과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기 위해 내면의 중심을 잡아가는 과정. 다른 존재들과 나의 인연조건을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 우러나오는 미덕이자 최고의 관계론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겸괘의 육이효를 통해 배운 겸손함이자 삶을 통찰하는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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