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런 정치가 지속되는 것이 어디 쉽겠는가? 아무리 조화로운 기쁨의 시대라 할지라도 권력 조직과 야합한 음험한 야심가들이 있을 테니 말이다. 이 야심가들의 욕망을 타고 선동가들의 더티 플레이가 펼쳐진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들이 내세우는 명분도 대중에게 유익함과 기쁨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대중의 혼란이 시작된다. 이 상황을 마주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구사효는 알려준다. “헤아리면서 기쁘게 해서 편안하지 못한 것이니, 절도를 지켜서 미워하면 기쁜 일이 있다.(九四, 商兌未寧, 介疾有喜.)”
구사효는 아래에서는 사악한 무리가 따르고 위로는 중정의 덕을 갖춘 군주를 받드는 양강한 신하의 모습이다. 그는 사악한 무리와 중정한 군주, 이 둘 사이의 경계에서 판단할 수 있는 자이다. 그는 경계에 서서 이쪽, 저쪽 모두를 보고 있다. 기쁨의 시대이므로 이쪽, 저쪽 모두 기쁨을 준다. 하지만 한쪽은 사악함이 포함된 편안하지 않은 기쁨이다. 『춘추좌전』에서는 이 기쁨에 대해 “아름답고 감질나는 맛있는 음식이 추한 돌보다 못하다.”고 한다. 아무리 탐스럽고 맛있으나 독버섯으로 요리된 음식이라면 차라리 돌을 씹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의 감각은 이것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당장 눈과 혀를 만족시키는 기쁨에 겨워 그 뒤에 오는 불편함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신체이다.
따라서 이때 필요한 것이 절도라고 구사효는 말한다. 절도를 지키는 것이 ‘개(介)’이다. 구사효는 돌을 씹는 것 같을지라도 ‘개(介)’로써 사악함을 끊어내야지만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편안하고 조화로운 기쁨이 올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러나 이렇게 힘들게 찾아온 기쁨의 감정이지만 구사효의 기쁨은 자신만의 기쁨이 아니다. 이 기쁨은 다른 사람들에게 두루 미치는 기쁨임을 구사효는 강조한다.
두어 달 넘게 정치 뉴스에 매달려 분노와 무력감에 젖어 있었던 일상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이 글을 쓰며 정리해보니, 내가 정작 괴로웠던 이유는 이 사건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빨리 해결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음에 대한 화였던 것 같다. 그리고 선동가들의 부도덕하고 비논리적인 외침과 그것에서 오는 부정적 감정의 피로함에서 속히 벗어나 편안해지고 싶어 했던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나는 이런 식으로 불의의 정치적 사건을 내 삶에서 배제시켰을 것이다.
사실 불의를 보면 분노하고, 부조리한 것을 알지만 맞서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권력을 마주했을 때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감정이다. 하지만 불의도, 거대 권력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감정을 덮어 버릴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분노와 무력감을 일으킨 대상의 사악함을 인식하고, 끝까지 저항하여 그것을 끊어내는 힘의 발현까지 가는 것, 그 뒤에 오는 기쁨이 진정 편안한 기쁨임을 깨달아야 한다. 불의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던 혁명가들의 삶에서 지극한 기쁨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이 진리는 분명하다. 그래서 이제부터 나는 지리멸렬하게 진행될 수도 있고, 모든 추한 것이 다 드러날 수도 있는 이 사건을 피하지 않고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