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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주역]싸움에서 이기고도 흉해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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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9-11-16 10:03 조회1,2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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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에서 이기고도 흉해질 때





장현숙(금요대중지성)

 

地水 師 ䷆

師, 貞, 丈人, 吉, 无咎.

初六師出以律.

九二, 在師, 中吉, 无咎, 王三錫命.

六三, 師或輿尸, 凶.

六四, 師左次, 无咎.

六五, 田有禽, 利執言, 无咎, 長子帥師, 弟子輿尸, 貞, 凶.

上六, 大君有命, 開國承家, 小人勿用.

 

어떤 일에서건 다툼(訟)이 일어나면 반드시 무리(師)가 지어진다. 사람들은 각자의 이익 또는 명분에 따라 하나의 무리를 선택하게 되고, 본격적으로 싸움판이 벌어진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싸울만한 상황을 아예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좋고,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것이 그다음으로 좋으나, 피할 수 없을 때는 적극적으로 싸워야한다. 지수사(地水師)괘는 싸움을 피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지수사괘를 공부하다 오래전에 남녀로 갈라져 싸웠던 일명 ‘커피전쟁’이 생각났다. 20대 때 특허사무실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연봉이라든지 시간 등 근무조건이 여러 면에서 괜찮았다. 당시 소장님에겐 이상한 고집이 있었는데, 직원들이 아침에 커피를 마시면 업무에 효율이 오른다는 거였다. 이를 위해 여직원들이 순번을 정해 30분씩 일찍 출근해서 커피를 탔다. 입소했을 때부터 정해져 있던 규칙이라 처음 몇 달은 아무 생각 없이 그 일을 했다. 그런데 하다 보니 부아가 나기 시작했다. 출근해서 느긋하게 신문을 펼치며 여직원들이 주는 커피를 받아 마시는 남자직원들을 보면, 그 면상에 뜨거운 커피를 부어버리고 싶었다. 왜 여직원만 커피를 타야하느냐고 항의했지만 ‘원래 그러했다’는 이유로 묵살되었다. 불만은 점점 커졌고 급기야 아침커피를 두고 여직원과 남직원이 편을 갈라 싸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자들은 기득권을 놓기 싫었고, 여자들은 억울했다.

지수사의 괘사는 정(貞)으로 시작한다. 정은 바름이다. 무리를 이끌어 싸움을 하는데 그 대의가 올바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다음은 장인(丈人)이라야 길(吉)하다이다.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시시각각의 상황에 맞게 대처하려면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진두지휘해야 하는 건 상식. 우리는 가장 경력이 많은 대빵 언니를 중심으로 뭉쳤다. 경력이 가장 많으니 상황에 가장 잘 대처할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명분이 올바르다고 생각했다. 아침커피가 필요하다면 남녀가 모두 공평하게 분담해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이상해졌다. 애초 싸움의 계기가 된 아침커피 문제는 점점 희미해지고 두 진영(남,녀)의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일들이 발생한 것이다. 서로를 비방하는 말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사무실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소장님은 우리들을 불렀고, 결국 필요한 사람이 각자 알아서 타 먹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아마 소장님의 중재가 없었다면 끝 모를 진흙탕 싸움은 계속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커피전쟁은 소장님의 중재로 종료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우린 이겼다. 그렇게 싫어하는 일을 더 이상 안하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아무도 우리의 승리를 축하하거나 공감해주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지수사괘를 공부하면서 그 이유를 알았다. 지수사의 초효는 師出以律 否臧凶(사출이율 부장흉)이다. 싸움에 있어 규율로서 군사를 일으키니, 그렇지 않다면 승리하더라도 흉하다는 것. 정이천은 “규율로써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비록 선한 의도를 가지고 최선을 다했더라도 또한 흉하며, 승리할지라도 흉한 길이다,”며 군사를 일으키는 것뿐만 아니라 군사를 행하는데도 규율과 통제로 행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마디로 싸움이 개판이 되지 않으려면 서로 간에 규율과 통제가 있어야 된다는 것. 우리는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데 너무 많은 감정을 이입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하기보다 자극적인 말로 비방하기 바빴다. 거기엔 어떠한 규율과 통제도 없었다. 여직원들이 들고 일어난 것은 아침 커피 당번을 남자직원과 동등하게 하자는 것이었는데, 그 목적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남자직원들의 권위적 태도라든가 흡연, 말투 등 다른 불만들을 끊임없이 지적하며 폄하하고 있었다. 어느 새 싸움의 이유는 사라지고 싸우는 여자들만 남았다. 그러다보니 ‘커피타기 싫다’는 것 말고 어떤 이유도 설득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너무나 당연히 부당한 일이지만, 그 당시, 그 작은 사무실에선 그 부당함도 설득해야 되는 시절이었다.

만약 우리가 처음 무리를 지어 일어날 때, 우리끼리 먼저 싸움을 위한 전략과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합리적 규율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師出以律(사출이율)은 군사를 일으키는데도 행하는데도 규율로써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규율도 없이 오로지 이기는 것만이 목적이 되는 싸움은 어떨까? 서로 너무 참담하지 않을까. 우리의 싸움은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목숨이 오가는 전쟁과 작은 사무실에서의 커피전쟁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쟁은 총칼로만 진행되진 않는다. 무리를 지은 후 상대편을 상대로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모든 행위는 일종의 전쟁이다. 소장님의 중재로 싱겁게 마무리되긴 했지만, 싸움 끝의 감정의 골은 오래 갔다. 우리는 비록 이겼지만(臧) 흉(凶)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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