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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은 니체]공부, 자기를 바꾸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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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9-11-17 13:48 조회1,7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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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자기를 바꾸는 사랑

재겸

며칠 전 같은 회사에 다니는 후배로부터 논문 편집본을 선물 받았다. 업무를 하면서 관심 영역에 공부도 하고 틈틈이 논문도 쓴 것이다. 그 후배와는 이전 다른 역할을 하고 있을 때 같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많았다. 공을 들여 만든 논문을 잊지 않고 전달해 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그 책자 안쪽에는 인사말이 쓰여 있었다. 논문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사람들이 잘 활용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쓴 글이었다. 그 글 앞에 ‘김 재겸님께’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나를 부르는 이름을 본 순간 반가웠던 마음이 사라졌다. 한참 후배가 직함도, 선배라는 붙임말도 없이 호명한 것에 기분이 상해서였다. 건방지다는 생각을 했었다. 왜 그런 감정에 휩싸였을까? 평소 난 그에게 격의 없는 대화가 좋다고 했다. 상사이기 보다는 같은 일을 하는 동료로 대했으면 한다는 말을 했던 기억도 있다.

  우리는 상품을 진열해놓은 가게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타인들이 우리에게 귀속시키는 외관상의 특징들을 끊임없이 정돈하거나 숨기거나 드러낸다. 우리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

《프리드리히 니체 / 아침놀 385 / 316쪽 / 책세상 》

그럴듯해 보여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말을 가져다 쓰지만 자신은 그 말을 지킬 수 없다면 그는 허영 된 자이다. 허영은 말과 자신을 분리한다. 남의 평판을 기준으로 자신을 그럴 듯하게 드러낸다. 허영심은 그럴 듯하게 보이는 자기를 만들어 자신을 덮어버리고 만다. 그는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는다. 타인이 욕망하는 삶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 사람인 것이다.

mask-1150221_1920허영심은 그럴 듯하게 보이는 자기를 만들어 자신을 덮어버리고 만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뜻대로 살고자 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애써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진실한 자신을 만드는 일이다. 자신이 스스로 진실 된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바람으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기 위한 방편의 하나가 공부다. 허영심을 없애고 진실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 그 호명 한마디에 무너지는 걸 보면 허영을 떨치지 못한 것이다. 몇 년간 읽었던 니체의 공부가 허무해졌다. 오히려 공부가 허영심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지적 허영으로서의 공부

니체는 주어진 진리는 없다고 한다. 주어진 진리란 누군가가 만든 진리일 것이다. 누군가의 맥락에서 만들어진 진리가 지금 나에게 통용될 리가 없다. 진리는 자신의 맥락 위에서만 있다. 진리는 지금의 맥락에서 창조하는 가상이다. 니체에게 미리 정해진 진리는 없다. 정해진 진리는 언제 어디서도 변함없이 통용되어야 할 것이다. 불변하는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바깥에 있는 실체로서 표상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일한 표상이 가능한 진리는 소유도 가능해질 것이다. 진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때문에 나는 변하지 않는다. 내가 소유한 물건 때문에 자신이 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는 그 물건을 모든 측면에서 살펴본다. 그리고 그대들은 이 사람이야말로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오직 값을 깎으려 할 뿐이다. 그는 그것을 사고 싶어 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 아침놀 342 / 300쪽 / 책세상 》

만일 어떤 물건을 사고 싶다고 생각해보자. 물건을 자세히 살피며 값을 매겨보고, 장사꾼이 부르는 값과 자신이 가름해본 값어치를 비교해 볼 것이다. 살펴보고 계산해본 후에 결정하는 것이 소유다. 그만큼 소유한다는 관념은 자신과 물건을 떨어트려 놓는다. 진리를 인식함으로써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도 그와 같다. 지식과 자신의 거리두기. 소유한 지식은 그 자신을 보존할 뿐이다.

인식을 소유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무엇을 자신의 소유로 하는 방식으로 인식하려면 그 대상을 어떤 관념에 고정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 관념을 무엇으로 표상해야한 소유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현대의 지적 탐구는 무엇을 표상하고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는 관념으로 행해진다. 마치 사냥하는 듯한 인식은 자신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지식만을 낳는다. 타인의 말을 가져와 그럴듯하게 꾸며서 말하지만 그것이 나를 바꿀 수는 없었던 것과도 같다. 지적 허영은 삶의 기예로 작동할 수 없다.

bird-of-prey-1107399_1920마치 사냥하는 듯한 인식은 자신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지식만을 낳는다.

니체는 사냥하듯이 행하는 인식에서 부족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 무엇을 사랑하게 되었다면 거리 두기가 불가능해진다. 그것을 사려고 할 때 저울질이 가능한 것도 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간을 볼 수 있는 상대는 아직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계산 능력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이성을 무력화시킨다. 마치 감염된 것처럼 사람을 변하게 한다. 인식의 방식도 그와 같을 것이다. 사랑하는 방식으로 인식하게 된다면 어떤 사유는 존재를 바꾸어 버릴 수 있다. 니체는 포획하고 소유하는 인식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한 인식은 무기력하다. 자신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소유하는 인식은 허영으로 자기를 덮어버린다. 지적인 허영으로서의 공부는 무기력하다.

니체의 공부법

1879년 부활절에 니체는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때문에 그는 대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사람들과의 교류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계절에 따라 다른 장소를 이동하며 요양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런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작 활동은 더 왕성해졌다. 니체는 그 시기에 염세주의자이길 포기했다고 자신의 체험을 고백했다.

  나의 생명력이 가장 약했을 때, 나는 염세주의자이길 포기했다. 자기 회복의 본능이 궁핍과 의기소침의 철학을 금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 이 사람을 보라 / 1장 2절 》

니체는 병이 자신에게 열어준 새로운 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병이 가져다 준 염세주의를 극복할 시기에 있었다. 니체의 긍정 철학은 역설적이게도 병이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니체의 문장들은 그의 체험이 만들어낸 것이다. 니체는‘내 저서들은 오직 나 자신이 극복해낸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고 썼다.

니체가 단언한 것처럼, 우리는 오직 체험하고 극복해내는 것만을 자신의 문장으로 생성해낼 수 있다. 그것만이 자신의 공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머지에 대해서는 침묵해야만 한다. 침묵하지 못하고 세상의 지식을 가져다 써버린다면 허영 된 자기로 자신을 덮어버리는 꼴이 된다. 허영은 자기를 체험하고 탐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한다. 그는 자기를 바꿀 수도 없다. 자신의 체험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로 자기를 극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공허한 말도 반복하다 보면 그 말이 자신이라고 믿어버리게 된다. 어쩌면 니체가 문장을 생산하는 원칙 자체가 공부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니체를 배우는 것은 그의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silence-3810106_1920침묵하지 못하고 세상의 지식을 가져다 써버린다면 허영 된 자기로 자신을 덮어버리는 꼴이 된다.

허영 없는 공부

이제 처음 제기했던 허영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한마디의 호명이 어떻게 좋지 않은 감정으로 전화된 것일까? 그 사건은 세상에 대한 나의 태도를 폭로한다. 직위나 나이로 인간을 서열화하는 관점을 나타낸다.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이제까지 공부해 온 니체의 인간에 대한 관점은 거기서 작동을 멈춰 버렸다. 니체의 문장을 허영으로 소유하고 싶었던 나를 그대로 까발린다. 자신을 바꾸지도 못했던 공허한 말을 흉내 내어 아무렇지도 않게 해댔던 것이다. 허영 된 말은 공부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지식을 자신과 격리시켜 소유의 대상으로 삼는다. 긁힌 자국도 만들지 못하는 지식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허영은 그 지식 자체를 자신이라고 착각하게 만들고 공부를 거기서 멈추게 한다.

사랑처럼 작동하는 것만이 공부다. 사랑할 때는 그녀와 나를 분리하지 못하는 것처럼, 니체를 공부할 때는 니체의 문장과 나를 이항으로 분리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공부한다는 건 그 문장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 때 그 문장이 나에게 상처를 주고 신체를 변형시킨다. 공부는 다른 자기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어쩌면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한 공부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문장이 나에게 작동하지 않는다면 공부가 아닐 것이다. 거리 두기를 멈추고 작동하는 공부로 돌아와야겠다. 언젠가 나를 뒤덮었던 공부는 몸 안에 흉터처럼 남아있을 것이다. 이제 다시 논문집에 실린 그 호명을 읽어볼 것이다. 그리고 그를 다시 친구로 만날 것이다.

book-3998252_1920공부한다는 건 그 문장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 때 그 문장이 나에게 상처를 주고 신체를 변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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