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처음 제기했던 허영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한마디의 호명이 어떻게 좋지 않은 감정으로 전화된 것일까? 그 사건은 세상에 대한 나의 태도를 폭로한다. 직위나 나이로 인간을 서열화하는 관점을 나타낸다.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이제까지 공부해 온 니체의 인간에 대한 관점은 거기서 작동을 멈춰 버렸다. 니체의 문장을 허영으로 소유하고 싶었던 나를 그대로 까발린다. 자신을 바꾸지도 못했던 공허한 말을 흉내 내어 아무렇지도 않게 해댔던 것이다. 허영 된 말은 공부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지식을 자신과 격리시켜 소유의 대상으로 삼는다. 긁힌 자국도 만들지 못하는 지식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허영은 그 지식 자체를 자신이라고 착각하게 만들고 공부를 거기서 멈추게 한다.
사랑처럼 작동하는 것만이 공부다. 사랑할 때는 그녀와 나를 분리하지 못하는 것처럼, 니체를 공부할 때는 니체의 문장과 나를 이항으로 분리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공부한다는 건 그 문장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 때 그 문장이 나에게 상처를 주고 신체를 변형시킨다. 공부는 다른 자기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어쩌면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한 공부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문장이 나에게 작동하지 않는다면 공부가 아닐 것이다. 거리 두기를 멈추고 작동하는 공부로 돌아와야겠다. 언젠가 나를 뒤덮었던 공부는 몸 안에 흉터처럼 남아있을 것이다. 이제 다시 논문집에 실린 그 호명을 읽어볼 것이다. 그리고 그를 다시 친구로 만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