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젊은 나이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맡은 것일까? 아니면 천성에 어울리지 않는 일을 했기 때문일까? 이도 아니면 그 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1869년, 니체는 바젤 대학의 고전 문헌학 교수가 되었다. 스물넷의 나이였다. 게다가 박사 학위도, 교수 자격 논문도 없었다. 그러나 대학 시절 그를 아꼈던 지도교수와 유명 학회지에 실린 니체의 논문들을 눈여겨봤던 바젤시 문부 담당자는 니체의 교수 채용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니체는 필요한 논문들을 면제받았다. 오늘날 같으면 특혜 시비에 휘말리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니체는 별 무리 없이 바젤 대학에 입성했다. 스물넷의 젊은 교수, 성공한 인생이었다.
니체에게 교수직 제안은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니체는 사실 고전 문헌학을 그만둘 생각이었다. 신학자가 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기대를 뒤로하고 니체는 문헌학을 택했고, 그만큼 열심이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리스 고전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니체는 문헌학에서 멀어져갔다. 그리스 철학은 삶을 위한, 고귀한 삶을 위한 사유들과 실천들로 넘쳐났건만, 문헌학은 죽은 문자들만을 뒤졌다. 니체는 문헌학에 흥미를 잃어갔다. 고전 문헌학은 “철학이라는 여신이 잘못 낳은 자식”, “고대 벌레와 곤충의 뒤를 쫓는 나방” 같았다.
그러나 교수직은 니체로서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의 공부가 인정받았다는 자부심,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줄 안정적 수입, 그리고 교수라는 이름에 따라붙는 명예. 물론 니체는 대학교수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억압적인 분위기, 무거운 책임감, 단조로운 업무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것은 더 이상 자유롭게 진리를 탐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니체는 바젤로 향했다. 그는 “속물”이 되기로 마음먹었고, 기도했다. “속물, 대중 속의 사람이 되도록 제우스여, 지켜주소서, 그리고 모든 여신도!”(크렐, 베이츠, 《좋은 유럽인 니체》, 박우정 역, 글항아리, 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