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다. 결단과 척결의 시기, 쾌괘가 주시하는 상대는 소인이 아니다. 쾌괘는 최후의 고지를 눈앞에 둔 이 순간까지 함께 달려온 동지들 각자의 마음장을 세밀하게 스케치하고 있다. 우선 아래 괘에 속하는 세 효부터 보자. 초효는 양의 자리에 온 양효답게 결기가 넘친다. 하지만 아직 그는 경험이 일천하다. 아무리 지위도 세력도 다 잃은 적이라해도 신중해야 한다. 상대는 노회하고 치밀한 소인이기 때문이다. 중도를 아는 이효는 음험한 소인의 야습(夜襲)에 대비해 사람들에게 경계령을 내린다. 성숙하고 적절한 행동이다. 삼효는 소인 상육효와 정응관계이다. 그는 소인을 척결하겠다며 단독 행동을 하는데, 여기엔 가만있다가는 자기가 의심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깔려 있다. 이렇게 이들은 처지에 따라 미묘한 차이를 보이지만, 그래도 굳건한 건(乾)괘에 속하므로 소인을 결단하려는 마음에는 일점 망설임이 없다.
문제는 사효다. “九四 臀无膚 其行次且 牽羊悔亡 聞言不信(둔무부 기행차저 견양회망 문언불신). 엉덩이 피부가 문드러져 행동이 머뭇거린다. 양을 몰면 후회가 없으며 말을 듣고도 믿지 않는다.” 구사효의 ‘엉덩이’ 아래에는 초효, 이효, 삼효가 있다. 얘들이 밑에서 씩씩하게 치받아 올라오는데 엉덩이로 누르고 있자니 피부가 상할 밖에. 그런데 왜 구사는 같은 동지인 양효들을 뭉개고 있을까? 택천쾌 괘의 상괘인 택(澤)괘는 연못과 기쁨을 뜻하니, 구사는 기쁨과 화합을 원하게 된다. 소인을 결단하고야 말겠다는 마음은 사그러들고 “이 정도는 놔둬도 괜찮지 않을까? 이제 별 힘도 없어 뵈는데 꼭 끝까지 척결할 필요가 있겠어?”하며 타협을 종용하는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이다. 뭇 동지들(羊)을 따르면 후회가 없을 텐데,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마음으로 수긍하지는 않는다. 구사는 이미 자기 혼자 마음 속으로 싸움을 정리하고 평화롭게 살 생각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읽을 때 구사는 어설픈 평화주의자, 공들여온 대사를 목전에서 그르치게 만든 내부의 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한데 뭔가 마음에 걸렸다. 결단이란 꼭 그렇게 흔들림 없이 단칼에 쳐내는 것인가? 이번에는 구사효의 편에서 다시 읽어보았다. 이 머뭇거림(其行次且)과 불신(聞言不信)은 왜인가? 택괘에 속하는 구사는 기질적으로 싸움을 싫어한다. 그런 그이기에 기가 죽을 대로 죽은 소인이 안쓰럽다. 게다가 소인은 왕의 최측근이다. 저 바른 왕이 반대할 리는 없지만 내심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 대세는 이미 우리 쪽으로 기울었으니 이쯤에서 그만 멈추고 싶은 것이다. 구사효는 나이로 치면 중년이고 직위로 치면 고위 관리자급이다. 청년시절의 결기는 숙어지고 삶의 복잡다단한 면모도 아는 때다. 돌진하는 청년의 속도에 브레이크를 걸고, 귀를 열고 듣되 판단은 자신이 한다. 그렇다고 결단을 그르치는 것은 아니다. 결단(決斷)은 물이 차올라 둑을 터트리는 일(夬 決也)이다. 물이 찰 때 보면 빠르게 수위가 올라온다. 그런데 가득 찼다 싶어도 물은 쉽게 넘치지 않는다. 표면장력 때문이다. 그 장력을 깰 만큼 물이 차야 드디어 쏟아지듯 넘치는 것이다. 구사효의 망설임과 불신(不信)은 표면장력과 같은 것이 아닐까?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이해 없는 결단은 너무 빠르다. 자기가 믿어온 것에 대한 회의 없는 결단은 너무 무섭다. 엉덩이도 아프고 발걸음도 주저하는 구사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결단은 너무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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