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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 한서라는 역사책]한나라의 쇠락,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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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9-11-24 09:45 조회1,2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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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의 쇠락,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길진숙

1. 아버지 선제의 탄식!

한나라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선제가 붕어하고, 장자인 유석이 제위를 이어받았다. 이가 곧 11대 황제인 원제(재위 기원전 48-기원전 33년)다. 원제는 선제가 평민일 때 결혼한 허씨의 소생이다. 두 살 때 선제가 즉위하고 여덟 살 때 태자로 책봉되었다. 아버지 선제가 어머니 허씨를 황후로 삼지 않았다면 첫아들이어도 태자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의리를 지킨 선제 덕분에 태자가 되었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지향이 달랐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태자 유석은 인자하고 유학을 좋아했다. 이에 반해 선제는 법가였다. 선제는 유생을 신뢰하지 않아 형리 위주로 신하를 기용하였고, 형명으로 신하들을 통제했다. 태자 유석은 법리에 올인하는 선제에게 브레이크를 걸었다. “폐하의 형벌 적용은 너무 각박하니, 유생을 기용하셔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선제는 분노했다.

태자의 행동은 용기 있고 정의롭게 보인다. 실상 법리적인 것에만 치우치면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죄의 유무만 따지게 된다. 자칫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법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잡아넣고 죽이기 위해 법이 존재하는 것으로 그 본질이 전도되기 쉽다. 『한서』에는 죄수를 잡는 데 혈안이 된 형리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들은 세상을 바로잡는 데 뜻을 두지 않고 단죄 자체가 목적인 듯 올가미를 씌운다. 죄를 증명하고 잡아들이면 만사형통이다. 일 잘하고 인정받는 형리일수록 각박하고 잔인했다. 법의 속성이 그런 것 같다. 그러므로 버릴 수도 없지만 전적으로 의지할 수만도 없는 게 법이다. 이런 점에서 태자의 염려는 옳다. 따라서 선제가 화를 낸 것이 권위적이고 부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선제는 태자가 자신을 비판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태자가 현실을 파악하지도 못하면서 섣부르게 원론만 내세웠기 때문에 분노한 것이다. 선제는 도적이 들끓고 문란한 때에 처하여 인정(仁政)만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시의에 맞게 패도(覇道)와 왕도(王道)를 혼합 적용해야지, 유생들의 주장대로 왕도정치만 옳다고 한다면 명분과 실제가 어긋나 혼란을 자초할 거라 확신했다. 선제는 단호했다. 엄정할 때는 엄정해야지 무조건 어질고 너그러운 정치를 펴는 게 최선일 수는 없다. 정책은 때에 맞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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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선제는 탄식했다. 단순한 입장 차이로 넘기기엔 심각한 문제라 여겼다. 태자가 현실에 너무 어두워 앞날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태자가 왕이 되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릴 게 뻔했다. 이후 선제의 마음은 태자로부터 멀어졌다. 선제의 눈길은 장첩여 소생의 둘째 아들 회양왕에게로 옮겨갔다. 회양왕이 똑똑하고 법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부모의 자식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외쳐보지만, 역사책을 보면 부모의 사랑 또한 때에 따라 식고, 움직인다. 선제는 자기를 닮은 데다 자기 뜻을 따르는 둘째 아들 회양왕을 신뢰했다. 총애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았다. 나라를 지킬만한 후계자로 회양왕을 점찍었던 것이다. 선제는 태자 유석을 폐위하고 회양왕을 태자로 세울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선제는 태자 폐위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막상 시도하려하자 마음이 약해진 것이다. 허황후와 아들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다. 선제는 민간에서 고생하던 시절 자신을 도와준 부인 허씨를 저버릴 수 없었다. 또한 미천한 신분으로 함께 고생했던 아들을 차마 내치기 어려웠다. 선제의 의리와 연민 덕분에 장자인 유석은 태자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그리고 황제로 등극했다.

이런 결과가 원제 개인의 입장으로 보면 다행이지만, 한나라 전체 운명에서 보면 좋은 선택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결론부터 말하면 원제는 아버지가 다져놓은 기반을 지키지 못했다. ‘나라를 혼란하게 만들리라’는 아버지 선제의 예측이 맞아떨어졌다. 원제 때로부터 한나라는 기우뚱거렸다. 『한서』를 쓴 반고도 원제의 통치기를 한나라가 쇠락하기 시작하는 때로 본다. 가을도 저물어 가고, 해도 기울어 가는 시기!

원제의 어떤 점이 나라를 기울게 했을까? 선제 말대로 유생을 기용했기 때문일까? 시의에 맞게 패도도 쓰고 왕도도 써야 하는데 왕도만 썼기 때문일까? 무엇이 문제였을까?

2. 반성하는 황제, 그럼에도 연속되는 재해?

『한서』 「원제기」를 보면, 원제의 재위 기간 내리 천재지변으로 얼룩져 있다. 원제 때는 마치 천재지변만 일어난 것처럼 보일 정도다. 해마다 홍수, 지진, 태풍 등의 재해로 백성들이 굶주리고 유랑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여기에 일식, 살별이 나타나는 등 편안한 날이 없었다. 「원제기」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연속된 자연재해는 그만큼 살기가 어려웠음을 방증하는 징표일 것이다. 그야말로 난세였다. 원제도 자기 시대를 난세라 여겼다.

  “지금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일월은 그 빛을 잃었고 성신이 역행하고, 산이 무너지고 불이 솟으며 지진이 일어나고 운석이 떨어지며, 여름에 서리가 내리고 겨울에 천둥이 치며 봄에 낙엽이 지고 가을에 꽃이 피며, 서리가 내려도 잎이 죽지 않고 수해와 가뭄과 황충의 피해가 겹쳐 백성이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며, 도적은 잡지 못하고 형벌 받은 사람은 거리에 가득하니 『춘추』에 기록된 재해가 모두 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폐하, 지금 이 시대가 치세입니까? 난세입니까?” 원제가 대답했다. “아주 난세이다.”

(반고 저, 진기환 역주, 「경방전」, 『한서』6, 497쪽)

이 시대 유생들은 통치자가 정치를 잘못하면 하늘이 재해를 내려 견책한다고 해석했다. 인간들이 뿜어내는 혼탁과 원망의 기운이 하늘을 움직이게 한다. 하늘은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의식을 가진 존재이므로 음양의 조화를 어긋나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경고를 보내고 책임을 물었다. 인간은 이 하늘의 경고를 알아차리고 하늘의 견책에 적극적으로 응답해야 한다. 특별히 통치자는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개선하며, 그 무엇보다 백성들의 삶을 살피고 돌봐야 한다. 한무제 때의 역사철학자 동중서가 ‘천인감응설’을 이야기한 이래 한나라 유생들은 이 이론을 철썩 같이 신봉했다. 황제들 또한 이를 유념했다. 자신을 탓하고 백성을 돌보라!

person-1209310_1920하늘은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의식을 가진 존재이므로 음양의 조화를 어긋나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경고를 보내고 책임을 물었다.

원제는 즉위하면서 유생들을 불러 기용하고 정사를 위임하면서 어진 정치를 펼치고자 노력했다. 그렇기 때문에 잇따르는 자연 재해에 무감할 수 없었다. 아니 매우 근신하고 전전긍긍했다. 음양과 재이에 밝은 자들을 천거 받아 재앙을 불러온 이유를 숨김없이 말하게 하고 재해 대책을 세웠다. 인간의 반성에 따라 하늘이 분노를 거두어들인다고 믿는 통치자들은 겸허하고 너그럽지 않을 수 없었다. 원제는 어진 정치에 뜻을 두었기 때문에 더더욱 성실하게 이 원칙을 따랐다.

  지금 짐은 고조의 위업을 이어받아 공후의 윗자리에 있지만 아침저녁으로 두려워하며 백성의 위급한 처지를 늘 생각하며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음양이 조화를 못 이루고 해와 달과 별은 빛을 잃었다. 백성은 갈 곳을 잃고 길에 나뒹굴었으며 곳곳에서 도적이 나타났다. 관리들은 나쁜 짓을 계속하고 백성을 돌보아야 하는 법도를 잃었다. 이는 모두 짐이 우매하여 천하를 다스릴 법도가 무너진 것이다. 허물이 이 지경에 이르렀기에 짐은 몹시 부끄러울 뿐이다. 백성의 부모된 자로 그렇게 백성에게 각박하니 백성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반고 저, 진기환 역주, 「원제기」, 『한서』1, 명문당, 517쪽)

계속되는 재해에 원제는 침통하고 또 침통하다. 이 모든 게 자기 탓이므로 부끄러워 백성을 볼 면목조차 없다. 자신의 우매함을 반성하며 백성들의 어려움과 억울함을 살필 뿐이다. 환과고독(鰥寡孤獨) 등 궁색한 백성들에게 생필품을 하사하고, 조세를 면제하고, 죄수를 사면했으며, 공전(公田)과 동산을 빈민에게 대여하고, 연좌죄를 폐지하고, 황실의 반찬수와 말 등의 가축 수를 줄이고, 제사를 줄이고, 황제 능을 조성하기 위해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일을 금지시켰다.

재해에 대처하는 원제의 태도는 나무랄 데가 없다. 뛰어나게 겸손하고 어질다. 반고가 평가한 바, “원제는 신하에게 관대하고 국량이 넓었으며 공경 검소하였으며 명령을 하더라도 부드럽고 고아하여 고인의 유풍이 있었다.”(반고 저, 진기환 역주, 「원제기」, 『한서』1, 명문당, 537쪽)

그런데 이쯤에서 드는 의문. 이 정도로 반성적이고 백성을 사랑하는 황제라면 하늘도 감동하여 재해를 멈춰야 하지 않는가? 재해가 불가항력인지라 이렇게 질문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인지 모르겠다. 재해가 닥치면 신속하게 대처하여 백성을 구휼하는 게 관건이니, 원제의 대처방식은 훌륭하다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혹 재해가 온다 하더라도 황제가 이렇게 대응할진대, 재해 자체는 무서울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반고는 원제 시대 전체를 천재지변으로 도배했다.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한나라 시대 천인감응설의 믿음 안에서 따진다면, 원제 시기 지속적으로 재해에 시달린 건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혹여 원제 통치기 천재지변에 대응하는 일 말고 다른 업적은 없었기 때문인가? 재해를 연속적으로 사건화하는 것은 오히려 원제의 무능과 오판을 드러내기 위한 ‘미언대의(微言大義)’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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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구휼하고 안정시키는 정책을 펼쳤음에도 여전히 백성들은 굶주리고 도적은 들끓고 관리들은 간악했다면, 원제의 정치에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으리란 ‘합리적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반성 잘하고 백성을 아끼는 황제에게 재해가 연속적으로 문제가 되고 혼란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원제의 반성이 관례적이거나 반성의 핀트가 맞지 않은 것이리라. 선제가 염려했던 바대로 원제는 현실을 분석하고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이 부족했음에 틀림없다.

3. 의존적이고 나태한 황제, 환관에게 빠지다!

왕도정치를 추구했던 원제는 즉위하자 유생들을 기용했다. 시경·서경·역경·예기·악기·춘추의 육경에 해박하고, 음양과 재이의 해석에 뛰어나며, 질박·돈후(敦厚)·손양(遜讓)·유행(有行)에 뛰어난 인재들을 불러 들였다. 젊은 시절부터 지향했던 바를 황제가 되어 그대로 밀고 나간 것이다. 원제의 시작은 이렇게 창대했다.

그러나 원제는 통치에 있어서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품성이 좋으나 능력이 없었다. 단적으로 인재를 보는 눈이 없었다. 원제는 ‘음양과 재이’에 통달한 유생을 특히 좋아했는데, 예언에 적중하고 그 원인을 잘 맞추는 자를 더욱 가까이하고 신뢰했다. 그렇지만 이들의 예측과 대책은 한계가 있었다. 황제의 실정과 황제 측근들의 전횡을 비판하면서 이를 바로 잡기를 촉구했지만, 황제는 그 말을 듣는 데 만족했지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하여, 재해의 대책은 주로 구휼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야말로 관례적인 인정 정치에서 더 나아가기 어려웠다.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기틀을 다잡는 정책, 백성들의 일상을 안정시키는 근본적인 대책에 이르지 못했다. 원제는 착하지만 어리석었다. 유생들은 전공지식은 갖췄지만 실제 정치에 크게 활용하지 못했다. 또한 유생 스스로 실세가 되는 데 눈이 멀어 음모와 술수를 꺼리지 않았다. 원제는 이 음모와 술수를 간파할 지혜도, 단죄할 결단력도 없었다.

buddha-1425834_1920원제는 이 음모와 술수를 간파할 지혜도, 단죄할 결단력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원제는 환관 석현에게 휘둘렸다. 제국이 망하는 두 가지 원인이 있으니, 하나는 환관이요 하나는 외척이다. 원제 때 환관이 발호하고 외척정치가 시작되었으니 한나라의 쇠락은 명약관화했다. 원제는 아버지 선제의 신임을 받던 석현을 중서령으로 임명했다. 석현은 크고 작은 정사를 빈틈없이 처리하고 영특했으며, 황제의 속마음을 잘 간파하여 총애가 조정의 제일이었다. 원제는 환관은 처족(妻族)이 없어 욕심을 내지 않는다 여겨 정사를 믿고 맡겼다.

원제는 신하들을 단속하고 통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석현이 신하들을 통제했다. 석현은 자신과 알력이 생기면 누구든 모함하여 법으로 얽어매었다. 강직한 재상 소망지를 모함하여 자결하게 만들었고, 자신들의 권력에 도전한 경방 또한 죄에 얽어매 처형했다. 원제는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했지만 자기 의견은 없었다. 결국 신하들에게 휘둘렸고, 환관 석현에게 의지했다. 판단력도 결단력도 행정력도 결여된, 유약하고 의존적인 황제였다.

기원전 38년 원제는 병환이 들면서 정사를 귀찮게 여겨 석환에게 위임해 버리고, 자신은 음악에 빠져 살았다. 난간에서 구리구슬을 굴려 맞추면 장엄한 소리가 연주되는 작은 북 등 특별한 악기 연주에 재미를 붙이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석현에 의지한 채, 나태하고 안일한 모습으로 황제의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그러다 재해가 이르면 자기 탓으로 돌리며 애통한 마음으로 백성들을 구휼하는 행정 명령을 내렸다. 원제가 젊은 시절 꿈꾸었던 인정 정치가 이런 모습이었을까? 폭군은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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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현은 정사를 마음대로 휘두르면서도 권력에서 밀려날 것을 두려워했다. 석현은 황제의 총애를 시험했다.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규율로 황제를 떠보기로 한 것이다. 석현은, 궁문을 닫은 이후에 관리들이 돌아갈 때는 반드시 황제에게 허락을 요청한 뒤에 궁문을 열겠다고 주청한다. 이후 석현은 일부러 저녁 늦게 제멋대로 궁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황제의 명이라 사칭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판하는 상서를 올리도록 유도한다. 과연, 사람들이 석현의 권력 남용을 지적하는 상서를 올린다. 원제는 웃으면서 석현에게 상서를 보여주었다. 석현의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석현이 이미 주청했던 바라 상소를 괜한 모함이라 여겼던 것이다. 석현에 대한 원제의 총애는 굳건했다. 석현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황제의 마음을 빼앗는 아첨의 끝장판을 보시라.

  폐하께서 소신을 너무 편애하시며 국사를 맡기셨기에 다른 신하들은 질투하며 저를 모함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님을 오직 폐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저는 미천하여 정말로 만 가지 국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천하의 원망을 받고 있기에 저는 국사의 요직을 반납하고 후궁에 들어가 청소라도 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오직 폐하만이 저를 가엽게 여겨 보살펴 주시어 소신을 살려주신 것입니다.

(반고 저, 진기환 역주, 「영행전」, 『한서』8, 498-499쪽)

원제는 석현의 아첨을 충심이라 여긴다. 정성을 다하는 신하, 사심 없는 신하. 원제는 신하를 믿었으나,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는 갖지 못했다. 원제의 함정은 이것이었다. 너그러움과 겸손과 공손과 검소라는 유가의 미덕만으로는 통치가 불가능하다. 원제가 딱 그랬다. 꿈이 있었으나 펼칠 수 없었다. 통치의 비전과 지혜와 실행력과 지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각박한 법리가 아니라 인의로운 유생을 구하는 데 뜻을 두었으나, 어리석고 무능하고 유약하고 의존적이고 안일한 탓에 권력을 탐내고 이득에 눈이 먼 신하들에 싸이게 되었다. 착하기만 한 건 문제다. 원제로부터 또 하나를 깨닫는다. 반성과 동정과 연민만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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