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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루몽의 페이지]홍루몽 결혼론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19-11-27 22:40
조회 : 82  






홍루몽 결혼론



김 희 진 (감이당 금요대중지성)

어렸을 때 나는 30살이 되면 내가 어떻게 변하게 될까를 상상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도저히 상상불가. 애를 업고 뒤집개를 든 어떤 아줌마를 막연히 떠올릴 뿐이었다. 그게 나라고 생각되지 않았고, 과연 그러한 ‘내’가 되는 그날이 올까 싶었다. ‘그날이 온다면…’ 한편으로는 설레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섭고 끔찍하기도 했다. 서른이라니!

이상한 건, 일단 서른을 넘기고 보니 오십이나 칠십을 상상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젠 반대로 어린 나를 떠올려보면 기억도 잘 안 난다. 거의 전생처럼 다른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다. 어렸던 그 때, ‘내가 아줌마가 되면 지금의 나는 그대로 존재할까? 과연 지금의 이 마음, 이 생각들, 이 꿈들을 다 품은 채 클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면…내가 없어지는 거잖아!!’ 라고 두려워했던 그대로, 어린 날의 나는 없어진 것이다.

결혼이라는 비극

홍루몽을 읽다보면 정말 수많은 주제들과 만나게 된다. 그 중 보옥이의 운명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고, 어려서부터 시종일관 자기만의 개똥철학을 펼치는 문제가 바로 ‘결혼’이다. 더 정확히는 ‘여자의 결혼’.

옥이가 결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두 갈래로 나뉘는데, 두 가지 모두 부정적이다. 하나는 여성이 결혼을 하면 완전히 못쓰게 변한다는 것.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어째서 여자들은 사내한테 시집만 가면 사내들의 못된 기운에 전염되어 저렇게 이상하게 변한단 말인가남자보다 더 고약하게 굴고 있잖아!”(4권, p.465)라는 말은, 한 시녀가 쫓겨 날 때, 어멈들이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그녀를 서둘러 끌고 가는 모습을 보고 한 말이다. 또 하나는 결혼은 불행이라는 것이다.

“여자들은 왜 나이 먹으면 꼭 시집가야 하는 거야? 시집가서는 또 왜 그러한 고초를 겪어야 하는 거구? 우리가 처음 ‘해당사’를 만들었을 때, 모두들 시를 짓고 함께 놀며 얼마나 흥겨웠었어? 그런데 지금은 보차 누나도 집에 가고, 그래서 향릉이조차 올 수 없는 데다가, 둘째 누나도 시집가고 보니 서로 마음과 뜻이 맞는 사람끼리 한데 있지 못하고 이 지경이 되어버렸지 뭐야….여기서 몇 년 더 지나면 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괴로워 죽겠어.”

어렸을 때는 함께 모여 자유롭고 즐겁게 놀았는데, 결혼이라는 사건은 소녀들을 하나씩 앗아간다. 어떤 가문인가로 가버리고는 돌아오질 않는다. 그럼 그 가문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고초를 겪는 걸로만 보인다. 위의 글은 시집간 둘째누나가 신랑한테 구박을 당하는 걸 알고서 슬퍼하는 장면이다. 보옥이가 울면서 누나를 데려오자고 청해보지만 어머니는 누구나 큰 누나처럼 귀비마마가 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모두 시집을 가게 되어 있으니 귀하게 살든 고생을 하든 자기 운명이다~~ 라고 달랜다. 한마디로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는 거다.

하지만, 황제의 여자라고 행복한가? 귀비는 왜 가족들을 만날 때마다 우는가? 그녀는 ‘부모 자식간에 생이별이니 가난한 사람들만도 못하다’면서 외로움을 토로한다. 황제의 여인은 아버지와 동생이라도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그래서 귀비가 아플 때 문병 와서도 밖에서 명첩만 들이밀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귀한 대접을 받든 구박을 받든 홍루몽에 소개되는 여자의 결혼은 고생이고 외로움이자 이별이다. 홍루몽의 비극적 파토스는 ‘결혼=헤어짐’이라는 전제 위에서 흐른다.

정말 놀라운 발상이다. 나도 이 글을 쓰면서야 이 전복적인 지점을 눈치챘다. 홍루몽에는 행복한 결혼식이 없다. 매파가 두어 번 오가고, 어느 날 자매 중 한 명이 좋은 옷을 차려입고 인사하고 사라지는 것이 결혼 묘사의 전부다. 영춘이도, 상운이도, 탐춘이도…. 연지곤지 찍고서 설레어하며 신랑을 기다리는 장면도 없고, 온가족이 시끌벅적하게 국수를 나누어 먹으며 흥겹게 결혼식을 연출하는 장면도 전무하다. 그야말로 홍루몽에서 자매들의 ‘결혼’이란 소리 소문 없는 증발일 뿐이다.

조선시대의 이옥은 한 소품글(희곡)에서 노총각·노처녀의 결혼을 재미있게 연출한다. 노처녀는 측간으로 달려가 ‘멍멍아, 내가 낼 모레면 시집을 간단다… 내가 너에게 허황된 말을 할 것 같으면, 내가 너의 딸자식이다’라며,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속마음을 내보인다. 우리 자신의 결혼과 숱한 친구들의 결혼을 떠올려 봐도 그렇다. 결혼은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이고, 새로운 인생의 시작으로 기쁘게 축하할 일이 아니던가.

그런데 나도 유일하게 한 결혼식에서 펑펑 운적이 있다. 큰언니의 결혼이었는데, 밖에서 식권도 나눠주고 이리저리 안내하느라 정신이 없던 나는 잠깐 들어가서 뒤에 서서 결혼식을 보다가 그만 목을 놓아 울었다. 당시 나는 언니와 매우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후련하다고 쌍수를 들어 춤을 춰도 모자랄 판이었는데 왠 눈물? 그것도 한바가지나? 전혀 뜻밖에 터져나온 울음에 나는 너무 당황하여 뒤로 숨었다. 혹시 누가 보면 신랑의 옛 애인이 와서 우는 줄 알까봐 끅끅거리며 울음을 참으려 했는데, 어떤 하객이 나를 보며 말했다. ‘아이고. 신부 동생인가보네’. 아니, 내가 전혀 슬프지도 않는데 터져나온 울음이 신부동생들의 보편적 울음이라는 말이 아닌가.

신부의 동생들은 운다. 보옥이는 누나들이 시집가면 엎드려 통곡을 한다. 홍루몽에서 결혼이 비극적 증발로 다뤄지는 이유는 그것을 바라보는 시점(視點)이 오직 보옥이의 입장을 반영하기 때문인 것이다. 내 안에서 튀어나온 정체모를 눈물의 근원을 보옥이를 통해 다시 만났다. 보옥은 분명 결혼의 비극적 내용을 보고서 우는 것 같은데, 기쁜 결혼(쌍수들어 환영할 결혼)에서까지 신부 동생들이 보편적으로 우는 것은 남겨진 자들만이 느끼는 다른 뭔가가 있는 것이다.

‘소녀’의 죽음에 보내는 애도

보옥이는 모든 스러지는 것들에 눈물의 애도를 표한다.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을 묻어주고, 시녀의 죽음에도 남몰래 혼자 제사를 지내면서 아름다웠던 존재들의 죽음을 절절히 슬퍼한다. 복사꽃이 떨어진 자리엔 맛있는 복숭아가 열릴 테지만, 보옥의 눈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무언가의 끝을 포착한다.

그렇다. 결혼은 만남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와의 헤어짐이다.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소녀시절의 끝이기도 하다. 동생들의 눈물은 이 ‘소녀’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아닐까?

그렇다면 ‘소녀’가 무엇이기에? 과거는 분명 어떤 기억이자 습관으로 나라는 주체를 총체적으로 이루고 있기에, 한 시절이 지나간 것을 소녀의 죽음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이 비약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럼 여기서 들뢰즈의 개념을 불러와 보자.

들뢰즈는 『천의 고원』에서 하나의 주체성 또는 견고한 인식에서 벗어나는 실천 방법을 제시한다. 하나의 규정성에서 다른 무엇으로 이행되는 과정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가 여성-되기다. 들뢰즈가 말하는 여성이라는 개념은 정확히는 ‘소녀’다.

결혼하기 전 명절의 풍경을 떠올려 보자. 절하는 사람(남자)도 아니고 일하는 사람(며느리)도 아닌 자, 그래서 한 명으로 셈해지지 않아 와도 되고 안와도 되는 그런 존재다. 그냥 주변에 어슬렁 거리다가 설거지나 돕고, 때마다 ‘시집 안가냐’는 소리를 듣는다.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임시로 머무는 주변인인 것이다.

홍루몽의 소녀들도 대관원이라는 가문의 내밀한 공간에서 꽃 같은 대접을 받으며 키워지지만, 결국 대관원은 가문의 주변부였고 그 곳을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들의 운명은 결국 가문들 간의 거래나 야합에 의해 강제적으로 결정된다. 그 순간이 되기까지 잠시 머무는 가부의 대관원은 규정되지 않은 존재들의 집합소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지닌 채, 아무도 아닌 존재로 있기. 우리는 이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고 어떤 확실한 정체성을 고대한다. 그래서 취직이 되면 기뻐하고, 결혼을 하면 기뻐하고… 아무튼지 뭔가가 되면 기뻐한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있는 것에 어떤 의미부여도 하지 않기 때문에 시작만을 보며 기뻐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옥이는 정반대의 눈으로 사건을 본다. 소녀는 죽고 주체에 갇히는 것이 보옥이가 보는 결혼이라는 사건이다. 어떤 존재의 생명력이 사라지는 순간으로 보는 것이다.

아마도 나도 소녀시절에는 가슴 가득 기쁨을 안고 살았던 것 같다. 나 스스로가 불안정한 존재였지만 그 불확실함을 사랑했었다. 모든 존재들에 연민을 품었던 것도 같다. 그것이 아마도 우주와 연결된 충만한 생명력일 것이다. 어른들은 감정마저도 이해득실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아서 나는 어른이 되어도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했던 것들. 그러나 어른들이 하나같이 다~ 그러는 걸 보면서 나도 결국 변하게 되지는 않을까라고 두려워했던 그 상실. 그것이 아마도 내 안의 소녀의 죽음인가보다. 오늘은 그 소녀에게 애도를 표하는 날로 삼아야겠다.

하지만 한편으로 스스로 위안해보자면, 살펴보았듯이 소녀는 어떤 실체가 아니다. 주체를 떠나는 순간의 불확실성,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 소녀의 부활이자 생생한 생명력을 회복하는 순간일 것이다. 그런 과정은 분명 도처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고, 우린 자기도 모르게 그런 순간에 계속 처했을 것이다. 단지 보옥이처럼 그 불확실성에 충만한 기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못보고 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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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猫冊   2019-12-09 18:43:01
 
길게 잡아 10년 이면, 온 몸의 세포가 전부 싹 바뀐다지요
그렇다면 결국 "과거의 나"와 내가 겼었던 "사건"들은 내가 붙들고 있는 상념이 전부일 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현재의 맥락이 중요한 거 겠지요

결혼생활과 관계없는 삶을 살아서인지, 철이 없어서인지...
저는 점점 더 이해득실과 관련없는 삶을 살고 있는데, 생명력 회복의 길로 가고 있는지는 글쎄요~
공부가 모자라서인가...  모르겠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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