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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주역]세상의 눈으로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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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9-11-27 22:46 조회1,7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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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눈으로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



신혜정(감이당 금요대중지성)

 

風地 觀 ䷓

觀 盥而不薦 有孚 顒若.

初六 童觀 小人 无咎 君子 吝.

六二 闚觀 利女貞.

六三 觀我生 進退.

九四 觀國之光 利用賓于王.

九五 觀我生 君子 无咎.

上九 觀其生 君子 无咎.

 

주역의 풍지관(風地觀)괘를 공부하면서 작년 이맘때 읽었던 책 한 권이 떠올랐다. 바로 『걸리버 여행기』. 어렸을 때는 주인공인 걸리버가 소인국과 대인국을 여행하면서 겪는 모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소인국, 대인국, 라퓨타, 후이넘, 4개의 나라를 통해 인류를 통렬하고 유쾌하게 비판하는 풍자소설이었던 것. 그런데 왜 관괘를 읽으며 이 소설이 생각났을까? 정이천은 관(觀)괘를 ‘봄’과 ‘보임’에 관한 서사로 풀고 있다. 여기에 각 효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즉 보는 것의 방법론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더한다. 이 지점이『걸리버 여행기』를 생각나게 했던 것 같다. 『걸리버 여행기』 역시 인간이라는 존재들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지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텍스트기 때문이다. 해서 이번에 관괘의 육이효와 소설 속 인물들을 엮어서 ‘제대로 본다는 게 무엇인지 알아볼까 한다.

먼저, 초육효를 살펴보자. 초육효에서 말하는 ‘어린아이의 봄(童觀)’은 소인국 사람들의 유치하고 쩨쩨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와 오버 랩 된다. 동관은 물리적으로도 키가 작아서 볼 수 있는 범위가 협소하다. 그리고 경험치도 낮아서 세상을 해석하는 눈이 제한적이라 현명하지 못하다. 스위프트가 소인의 시선을 통해 말하려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 그들은 ‘달걀을 어느 모서리로 깰 것이냐.’를 두고 당파싸움을 벌일 만큼 어리석다. 또, 대인국 사람들의 시선은 너무 거칠다. 어떤 대상을 미세하고 세심하게 관찰할 줄을 모르니 주마간산(走馬看山)식으로 뭐든 대충 보고 판단한다. 이 역시 제대로 본다고 할 수 없는 것.

소설 속에서 내가 가장 공감이 가고 재미있었던 건 허공에 떠 있는 섬, 라퓨타를 여행하는 부분이었다. 작가인 스위프트가 풍자하고 있는 내용이 관괘의 육이효가 전하는 메시지인 ‘규관 이여정(六二 闚觀 利女貞).’과 여러 면에서 겹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육이효에서 규관(闚觀)이란 아녀자들이 기거했던 규방에서 문틈으로 엿보는 것. 이는 한쪽 눈으로 훔쳐본다는 말이니 분명하게 본다고 할 수 없다. 그러니 육이효의 「상전」에서 “문틈으로 엿보는 것은 여자의 올바름이니 부끄럽고 추할 수 있다.” 고 말하는 거다. 규방에서 생활하며 활동 영역이 제한적이었던 여자, 또는 다른 사람의 본보기가 될만한 인물이 못 되는 소인의 경우라면 별 상관이 없다. 위에서 하는 일을 순종하는 것만으로도 이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자신의 언행이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만한 위치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라퓨타의 고위 관리들이 육이효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들이다. 그들은 일단 생김새부터가 범상치 않다. 한쪽 눈은 얼굴 깊숙이 박혀 있고 다른 한쪽은 위를 향해 달려 있다. 여기서 눈이 안으로 깊이 있다는 건 자기의 틀에 갇혀 세상을 보는 것이고, 위를 향해 달린 눈은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지식에 매몰되어 대상을 규정짓고 판단하는 왜곡된 시선을 의미한다. 어찌 됐건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좁은 틀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규관이다. 라퓨타는 섬을 공중에 띄웠다 내렸다 할 만큼 문명이 발달하고 부유한 나라지만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관리라는 자들이 독단에 빠져있고 공중의 섬에서 가느다란 줄에 달린 메모지로만 지상의 백성들과 소통을 하니 어찌 올바른 정치가 이루어지겠는가.

풍지관괘는 결국 무엇을 보느냐가 아닌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이야기하고 있는 괘이다. 사실 본다는 행위는 지극히 주관적인 거다. 나의 내면과 외부의 세계를 따로 떼어서 볼 수 없기 때문. 고로 내가 보는 그만큼이 내가 구성하는 세상이 되는 건 당연지사. 예를 들어 세상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면 내 주변은 늘 그런 상황이 연출되는 거고, 좁쌀알 같은 소견으로 매사를 본다면 딱 거기까지가 나의 수준이 되는 것. 그러니 제대로 본다는 건 바로 이런 관계성을 인식하고 매사를 진지하고 세심하게 살피는 거라고 말할 수 있다.(盥而不薦) 정이천은 주역에서 지혜롭고 총명한 자는 “세상의 눈으로 보고, 세상의 귀로 듣는다.”고 말했다. 세상의 눈과 귀를 얻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나의 시선에 매여서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외부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눈과 귀를 여는 것, 천지 만물을 살펴 지혜를 얻음으로써 내 인식의 지반을 넓혀가는 거다.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규관(闚觀)으로는 절대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없다. 관괘에서는 나를 살피는 관아생(觀我生), 나로부터 생겨난 걸 면밀하게 관찰하는 관기생(觀基生) 또한 아주 중요한 덕목이라고 강조한다. 스스로를 성찰하며 수신(修身)하고 겸허하게 세상과 만나는 것이 관괘에서 말하는 제대로 된 관(觀)의 태도이며 세상의 눈을 얻는 길이기 때문이다.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스위프트 역시 여행을 통해 세상의 눈, 세상의 귀와 쉼 없이 접속하며 스스로를 통찰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 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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