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오효는 “대인호변 미점유부(大人虎變 未占有孚)” 대인이 호랑이로 변하는 것이니, 점치지 않아도 믿음이 있다는 뜻이다. 대인이 호랑이로 변했다니? 대인은 어떤 사람이고 호랑이로 바뀌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문언전에서는 “무릇 대인이란 천지와 그 덕을 합하고, 일월과 그 밝음을 합하며, 사시와 그 차례를 합하고, 귀신과 그 길흉을 합하는 자”라고 한다. 즉, 대인은 성인의 경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경지의 대인이 그냥 사람으로 있지 않고 호랑이로 변한다. 동파는 대인이 호랑이로 변혁했다는 것은 “천하를 일신(一新)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는 대인의 변혁이 억지로 마음을 낸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천하를 새롭게’ 하는 것이 어떻게 억지로 마음을 낸다고 되겠는가? 정이천은 이것을 “천지의 음양이 미루어 옮기고 고치고 바뀌어 사계절을 이루어서, 만물이 이에 생겨나고 자라고 이루어지고 끝마치는 것”의 마땅함이라고 한다. 즉, 대인이 호랑이로 바뀐 것은 천하가 변혁하여 사계절이 이루어지는 이치와 같다. 이는 누구나 점을 치지 않아도 능히 믿을 수 있는 사실이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올까?”라는 의문이 일어나 점을 치는 사람이 있을까? 사계절은 변혁의 때가 되어 변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와 동일한 현상인 대인의 변혁은 점을 치지 않아도 될 만큼 믿음이 있는 변혁이다. 이 변혁은 지극히 당연한 세상의 이치에 의한 것이었기에 호랑이 문양이 선명한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구오효의 대인의 변혁을 알고 나니, ‘존재의 변환’이란 의지를 가진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노력하면 이루어질 것처럼 목표를 가지고 접근할 것도 아니다. 마땅한 이치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변혁, 때가 되면 드러나는 것이 ‘존재의 변환’이다. 이 이치를 몰랐기 때문에 나는 새로운 번뇌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매 순간 우리는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 자연에 사계절이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도 생로병사가 있다. 이 과정이 우리 삶의 변혁의 때이다. 하지만 우리는 늘 잊어버리고 지나친다. 그리고는 사후 약방문 두드리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는 늙은 뒤에 젊음에, 아픈 뒤에 건강한 것에 집착하여 탐진치의 번뇌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공부의 시작했다는 것은 참 다행이다. 공부를 하다 보니 생로병사의 과정, 그 속의 미세한 마디마디 현재를 종종 만나게 된다. 그 순간 세상이 새롭게 보인다. 옛것을 버리고 현재에 서 있기에 새롭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존재의 변환’은 목적이 될 수 없다. 변혁의 때를 가고 있는데 또다시 ‘존재의 변환’을 목적으로 삼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저 이 변혁의 때를, 이 과정을 무심히 가면 된다. 여기에는 좋고 나쁨도 없다. 언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다. 현재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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