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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주역]백비, 본바탕을 잃지 않는 꾸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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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9-12-14 16:35 조회1,2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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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비, 본바탕을 잃지 않는 꾸밈



장현숙 (감이당 금요대중지성)

山火 賁   ䷕

賁, 亨, 小利有攸往.

初九, 賁其趾, 舍車而徒.

六二, 賁其須.

九三, 賁如濡如, 永貞, 吉.

六四, 賁如皤如, 白馬翰如, 匪寇, 婚媾.

六五, 賁于丘園, 束帛, 戔戔, 吝, 終吉.

上九白賁无咎.

 

감이당(坎以堂)에서 공부한 지 3년이 되던 해였다. 2년까지는 고만고만하게 경쟁하며 우리끼리 희희낙락하며 글을 썼는데, 3년째부터는 분위기가 달랐다. 매주 돌아가며 발표하는 발제문부터 시작해서 모든 글쓰기가 2년까지와는 차원이 다르게 어려웠다. 나는 매주 어리바리하며 어쩔 줄을 모르는데, 한 해 먼저 시작해서 이런 분위기에 적응한 다른 친구들은 너무나 글을 잘 쓰는 것이었다. 그들에 비해 내 글은 너무 볼품없고 초라해 보였다.

어느 날, 『도덕경』을 발제하는 날이었다. 『도덕경』 제81장 ‘信言不美 美言不信(신언불미 미언불신)’에 대한 발제문을 썼는데, ‘믿음직스러운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노자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름다운 말로 글을 잘 쓰고 싶다’고 발표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도덕경』을 이해하고 싶지 않다. 노자의 그 많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진솔한 말보다는 아름다운 말로, 깊은 지혜와 함께 박식함도, 낮게 흐르는 물보다는 높이 솟은 산이 되어 보고 싶은 내 속의 욕망을 보기 때문이다.” 이는 그날 쓴 나의 발제문의 일부이다. 발제문 발표 후 선생님께 눈물이 쏙 빠지도록 야단을 맞았다.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야단을 맞은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생각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글쓰기부터 배워야지 미사어구로 치장하는 습관부터 들이면 안 된다고 하셨다. 한번 습관이 들면 그걸 바꾸는 건 너무나 어렵다며, 아름답진 않아도 진솔한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다고 지금 여기서, 당장 다짐하라고 말씀하셨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산화비괘는 꾸밈과 장식에 대한 괘이다. 괘 모습을 보면 간(艮)괘가 상징하는 산 아래에 이(離)괘가 상징하는 불이 있다. 불이 산을 비추어 산 위에 있는 풀과 나무 등 온갖 사물이 모두 광채가 난다고 하여 ‘꾸밈’을 상징하는 비(賁)괘가 되었다. 비괘의 괘사를 보면 일단 亨(형통)하다고 시작한다. 뭔가를 꾸며서 장식하는 것은 형통한 일이라는 것일까? 그런데 그 다음이 좀 이상하다. 小利有攸往(소리유유왕)이라 하여 ‘나아갈 바가 있는 것이 조금 이롭다’고 했다. 꾸밈, 장식이라면 무언가를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이므로 나아갈 바가 이로워야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조금’ 이롭다고 한다. 왜 그럴까? 정이천은 이에 대해 “장식으로 꾸미는 방식은 바탕에 광채를 더할 수 있을 뿐이므로, 일을 진행해 나아가는 데에는 작은 이로움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장식으로 꾸미는 도가 형통할 수 있는 것은 진실한 바탕이 꾸민 장식으로 인하여 형통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는 꾸미는 것이 형통한 것은 그것으로 인해 진실한 바탕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지, 꾸밈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는 것. 그러니 괘사에서 ‘형통하다’고 한 것은 꾸밈 자체를 두고 한 말이 아니다. 꾸밈으로 인해 진실한 바탕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은 꾸밈은 단순히 무언가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 꾸밈으로 인해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잘 드러내게 하는 꾸밈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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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밈과 장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말과 글을 들 수 있겠다. 말과 글은 마음속에 담겨있는 뜻(意)을 바깥으로 장식하여 드러내기 때문이다. 같은 뜻이라도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게 드러날 수 있다.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하지 못하다’고 한 것은 드러내고자 하는 뜻에 비해 말이 너무 화려해진 상태를 말한다. 미사어구가 덕지덕지 붙여져 실제로 어떤 뜻을 드러내고자 하는지 모르는 말. 뜻을 드러내기 위해 말을 썼는데 그 말이 뜻을 가려버린 상태. 꾸밈이 형통한 것은 본바탕이 잘 드러나도록 하기 때문이고, 글이 좋은 것은 뜻이 잘 드러나도록 하기 때문인데, 꾸밈이 본바탕을 가려버리면 그 꾸밈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 산화비괘에서 내가 특히 관심을 가진 효는 상구효이다. 백비 무구(白賁 無咎). 백비는 꾸밈을 희게 한다는 것인데, 꾸밈이 희다는 것은 안 꾸민다는 뜻이 아니다. 정이천은 “질박한 바탕을 좋아한다는 말은 꾸밈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화려함이 본바탕의 진실을 없애지 않게 하는 것이다.”며 백비를 설명한다. 상구효는 꾸미는 때에 가장 높은 자리에 있으므로 꾸밈을 주도할 수 있는 자이다. 얼마든지 과도하게 화려하게 꾸밀 수 있는 자이다. 그러나 이 자는 꾸밈을 희게 한다. 왜? 과도한 꾸밈은 본바탕의 진실함을 잃게 한다는 것을 아는 자이기 때문이다.

글은 천지만물에 대한 나의 마음을 드러내는 수단이다. 그러니 글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천지만물을 대하는 내 마음이 드러난다. 내 글이 꾸밈과 장식에 치중하게 된다면 나는 내 뜻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글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꾸미는 그 자체에 마음이 홀린 것이다. 드러나는 뜻은 작고 꾸밈이 큰 글은 그 화려함에 홀려 당장에는 눈에 잘 띌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솔한 마음의 여운이 남지 않는 글이 얼마나 오래 갈까? 그래서 그날, 아름다운 글보다 진솔한 글을 선택하라고 선생님은 그렇게 소리 높여 야단을 쳤나 보다. 그 후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들 때마다 내가 잘 쓰고 싶은 글이 단순히 아름다운 글인지 아니면 진솔한 글인지 나 자신에게 묻곤 했다. 백비 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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