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전에서는 어린 여우가 미제의 때에 나아가면 흉한 것은 아직 자신의 적당한 위치를 찾지 못해 어긋난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동파는 이 상황을 기다림으로 해석한다. 현재 어린 여우의 상황과 마음과 능력은 모두 어긋난 상태이다. 어리기에 상황 파악이 힘들고 강을 건너고 싶은 욕심은 나지만 능력은 미달이다. 하지만 어린 여우는 잠재적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기에 기다리면 건널 수 있다. 어린 여우는 기다릴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헤엄치는 능력을 기르는 수련. 다시 말하자면, 삶의 시작점, 강변에 선 어린 여우에게 미완성의 때는 삶이라는 큰 강을 건너기 위한 수련의 과정이다. 아직은 어긋나 있지만, 어린 여우는 이렇게 성장하고 변화하며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고전 평론가! 각자 나름의 삶에 대한 간절함, 또는 우연한 마주침에 의해 많은 도반들이 이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이 과정을 가고 있는 우리는 모두 강변에 서 있는 어린 여우가 아닐까? 모두 쉽지 않은 과정을 가고 있다. 중간중간, 누구는 절망하고 누구는 그만두고 싶어 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올해도 글쓰기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그런데 한편으로 1년의 과정을 조각조각 나누어 현실에 들어가 보면 다른 면들이 보인다.
텍스트를 공부하는 벗들이 모여 세미나를 열었고, 사우들 앞에서 중간 과정을 발표도 해보았다. 필사하고 같이 암송하고, 이 고전을 삶에 적용해보자고 공부 모임을 만들어 머리 맞대고 토론도 해보았다. 아직 고전 평론은 삐거덕거리고 있지만, 그 과정 안에는 수많은 만남이 있었고 스토리가 탄생하고 있었다. 이 만남에 목표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있을까? 이 이야기들에 완성과 미완성의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을까? 그 과정은 그저 온전한 삶이었다. 나의 글쓰기는 미완이었지만 그것으로 가는 과정으로서의 삶은 창조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안티 오이디푸스』 리라이팅을 주제로 ‘내 인생의 주역’ 글쓰기를 하고 있다. 글을 쓰고 있다. 지금은 미제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