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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심없는 기계] 알고 싶다? 만나고 싶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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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0-01-11 16:30 조회1,6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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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심없는 기계] 알고 싶다? 만나고 싶다! (2)


수정(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두 번째 사건파일 : 그것은 도처에 기능한다!

양삭에서의 셋째 날, 호정이와 석영이의 몸이 좋지 않았다. 우리는 다른 도시에 가려던 일정을 취소하고 근처 상공산에 가기로 했다. 상공산은 거의 정상까지 차로 갈 수 있고, 숙소 앞 슈퍼마켓 겸 여행사를 운영하는 사장님이 “상공산 피야오량!(상공산 예쁘다!)”이라며 추천해주셨기 때문이다. 근영샘은 그곳에 가는 택시를 예약하려고 개중 멀쩡한 나를 찾으셨다.

그런데 근영샘은 모르셨다. 내가 아는 중국어가 ‘하오하오(좋아요)’나 ‘셰셰(고맙습니다)’ 뿐이라는 것을…! 근영샘은 친구들이 “수정언니 중국어 못해요!”라고 말하자 몹시 당황하셨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샘과 함께 사장님을 만나러 갔다. 내가 핸드폰 번역기와 손짓발짓을 통해 사장님과 비용 이야기를 열심히 하고 있을 때였다. 근영샘이 사장님 핸드폰에 번역된 한국어 문장을 보고 놀라셨다. “이걸 어떻게 알아볼 수 있어?” 처음에는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에게는 거의 완벽한 문장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영샘에게는 그 일이 꽤 놀라운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그러시는 줄 알았는데, 샘이 계속 그 얘기를 하시자 나도 덩달아 놀라워졌다. 아저씨 말을 알아들으려고 엄청 집중했던 모습을 보시고 ‘안티 오이디푸스를 잘 못 읽겠다는 건 다 뻥이다!’라고 하실 때는 부끄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신이 났다. 내게도 접속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니. 들뢰즈·과타리가 말한 대로 그것은, ‘접속하려는 힘’은, 이미 도처에 기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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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하다. 석영이와의 일처럼 매사 주춤거리던 내가 어떻게 움직이게 된 걸까? 평소 나는 어떤 액션을 취하기 전에 상대를 의식하며 그 속마음을 가늠해보곤 했다. 대개는 ‘저 사람도 나를 불편해하고 있을 거야.’ 같은 부정적인 망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장님이 어떤 사람인지, 또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사장님과 나 사이에는 언어가 다르다는 커다란 장벽이 있었기에 그의 말 한 마디, 표정, 제스처도 놓치지 않아야 했다. 그야말로 스타트선 앞에 선 달리기 선수의 ‘스탠바이’ 상태였다고나 할까. 그것은 두려워서 온 몸이 딱딱해지는 긴장과는 달랐다. 반대로 뭐 한마디라도 놓칠까 귀가 쫑긋해지고 온 몸의 세포가 활짝 열리는, 뛰쳐나가기 위한 힘을 극도로 응축해놓은 모드였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은 의식적이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어플을 내밀었다. ‘자동차로 상공산에 가고 싶습니다. 4명.’ 이 문장으로 우리의 치열한 대화는 시작되었다. 그 시간이 너무도 쏜살같이 지나가 자세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나는 번역기가 번역하기 쉽게 간단한 문장을 만들려고 애썼고, 사장님이 조사가 엉망으로 번역된 한국어 문장을 내밀었을 땐 완벽하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두뇌를 풀가동 했다는 것밖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 땐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OK 사인을 보냈고, 근영샘이 내가 잘못 이해한 것 같다고 했을 땐 망설임 없이 다시 물었다. 사장님도 비교적 정확한 문장이 나오기까지 번역기에 말하고, 또 말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달했으며, 이해했다. 아, 그 과정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사실 나는 사장님을 보기 전부터 기대에 차 있었다. 이유는 별 거 아니었다.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렇기에 중국어를 모르면서도 무작정 근영샘을 따라 갔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만나고 싶다는 마음 하나뿐이었는데 나는 사장님과 누구보다도 강렬한(?!) 접속을 할 수 있었다. 무엇을 꼭 알아내야겠다는 목적의식도 없었다. 석영이 때처럼 속마음이 어떤지 짐작하고 살피는 과정도 없었다. 그저 이 만남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예감으로 무작정 부딪혀보니 마음이 열리게 되고 오롯이 그 상황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자 상대의 반응이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내가 포착했던 것은 단지 정보가 아니라 그것과 함께 섞여 들어오는 감정이었다. 그 감정은 즐거움, 기쁨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순수한 ‘강도(強度)’ 그 자체였다. 나는 그 강도를 따라 상대의 이야기에 빨려들어 갔다. 그것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의 긴장과 리듬감을 동반했다! 겉으로는 우리가 정보만을 주고받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그 안에는 다른 흐름들이 바삐 오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움직임을 좇느라 ‘나’라던가 ‘너’라던가 하는 의식은 까마득히 잊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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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상대를 짐작하는 마음, 알고자 하는 마음이 오히려 강렬한 접속을 막는 장애물이었다는 걸! 알고자 함은 접속하는 마음이 아니라 만남으로 인해 ‘정보’를 얻길 바라는 것이다. 그럴 때 만남은 앎의 수단이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만났을 때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진정 원했던 것은 만남 뒤에 얻게 될 것들이었기에.

그건 마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파티에 간 비즈니스맨의 마음과 같다.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혹은 인맥을 위해 그 자리에 가면 상대의 마음에 들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느라 파티를 즐기지도, 그렇다고 사람과 소통하는 재미를 느끼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상대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입바른 말로 환심을 사는 것은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을 신뢰하게 되는 문제는 서로 접속하여 마음이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즈니스맨처럼, 앎이 곧 접속이라는 믿음으로 사람을 만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롯이 ‘만나고 싶다’는 마음,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과 즐거움에 이끌려 접속하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밝고 경쾌한 접속의 세계가! 그렇게 만남 자체에 집중할 수 있을 때라야 진정으로 상대와 통할 수 있게 된다. 그럼 앎은? 자연히 따라온다! 정보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한 질(質)들을 포함하고 있는 앎이.

나 또한 이제껏 저자들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었다. 하지만 말로는 ‘만나고 싶다’, ‘접속하고 싶다’라고 표현했기에 그것이 내 욕망인 줄 오해하고 있었다. 책이 읽히지 않을 때마다 ‘만나고 싶은데 왜 안 되는 거야!’ 라며 스스로의 능력 탓을 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떻게 책을 보아야 할지 조금은 알겠다. ‘알고 싶다’가 아닌 ‘만나고 싶다’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리저리 재는 것이 아닌,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의 들뜸과 기대, 즐거움으로. 그렇게 그 만남 자체에 충실하여 ‘나’라는 의식도 ‘너’라는 의식도 버리고 책으로 흘러들어가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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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를 벗어나 생기발랄 하라

이 사건은 내게 접속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려줌과 동시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더불어 접속의 즐거움을 알게 해준 샘과 친구들, 그것이 펼쳐진 시공간, 이 여행이 좋았다. 그러자 같이 여행하는 친구들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친구들이 무엇을 보고 뭘 느끼는지 궁금해지고, 괜히 말을 걸고 싶었다. 샘과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양삭부터 떠나는 날 상해공항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걷고 먹고 수다를 떨었다.

근영샘이 힙합에 갖고 있었던 오해, 거기에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석영의 욕망이 교차하자 뿅 생겨난 역사적 인싸 되기 세미나, 호정이가 어떻게 성에 보수적이 되었나, 왜 청년의 이야기를 청년이 해야만 하는가 등등. 서로의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새롭게 알게 되고, 생성되는 이 장은 흡사 들뢰즈·과타리가 말하는 욕망 기계들의 움직임과 닮아있었다! 오로지 연결과 접속만이 있는 세상 말이다. 그렇게 지키고 싶었던 나로부터 떠났는데도, 정말이지 나는 이 여행이 즐거웠다.

두 달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힘을 잃고 내 안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다시 올라올 때 그 때의 기억을 등불삼아 나아가고 싶다. 사람들을, 책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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