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손을 잡고 갈 수 있을 때 첫 번째, 자기와 가족과 친구들을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할 때 원하는 것이 별로 없어야 해요. 아까 보증 이야기 잠깐 했습니다만 친구가 보증을 서달라고 말하면 그 친구랑 친구 안 하기를 원하면 돼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그 사람이 하고 있잖아요. 보증을 서주라고 말하고 있잖아요. 친구가 굉장한 괴로움 속으로 들어갈 일을 아무 생각 없이 하고 있잖아요. 근데 이것은 해도 괜찮은 일인 것 같고 거기에 돈 5천만 원을 안 주면 나는 엄청나게 잘못한 것처럼 착각을 하는 거예요. 이것은 전도된 생각이라고 그러는데, 너무나 착한 사람이 정말 안 해줘도 괜찮은 것을 안 해줘가지고 마음이 막 아픈 거예요. 이런 일들이 많은 거예요. 물론 잘 하는 사람도 계시겠죠.
그래서 도를 볼 때 첫 번째, 내가 어떻게 세상과 나를 보는 것인가 라는 것을 잘 살펴서 이것에 전환이 발생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괴로워요. 괴롭습니다.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가족을 어떻게 볼 것인가. 친구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설정을 해야 돼요. 초기 값을 잘 설정해야하는데 어렸을 때는 이 값이 자기가 생각한 대로 설정할 수가 없어요. 환경이나 등등에 의해서 그렇게 설정이 돼버려요.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들어서 생각을 깊이 해가지고 저 설정값을 계속해서 바꾸는 훈련을 해야 해요. 이 바꾸는 훈련은 머릿속에서 발명되는 거예요.
정사유는 바로 그런 일을 끊임없이 해야 됩니다. 내가 입으로 뭔 말을 하려고 하다가 이 말이 나와 같이 손을 잡고 인생길을 걸어가는, 도반이라는 말이 인생길의 반려자라는 말이에요.
걸어가는데 괴롭게 걸어갈 것인가, 괴롭지 않게 걸어갈 것인가를 빨리 알아차려가지고 괴로운 일이 발생한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고 하면 머릿속에서 빨리 생각 회로를 바꾸는 훈련을 해야 해요. 그게 사유예요, 사유. 우리 그냥 생각하면 ‘야 너는 의리 있어.’ 근데 잘 살펴보면 그건 의리 있는 일이 아니고 바보 같은 일을 하면서 의리 있는 사람처럼 착각을 하는 게 많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한테 이미 익혀진 행동양상이 어떻게 가는지, 바보처럼 가는지 그걸 불교용어로 무지라고 합니다. 아니면 번뇌가 안 생기는 쪽으로 가는지를 빨리 살피는 생각의 훈련을 자주 해야 됩니다, 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