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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리포트]코로나가 왔다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20-03-27 14:25
조회 : 656  






코로나가 왔다



김 해 완

올라, 코로나

코로나가 왔다. 두 달 전에 쿠바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일 거라고 나눴던 담소가 다 무색해졌다. 그때는 코로나가 아직 중국에서만 난리법석을 치고 있었다. 분자 크기에 불과한 바이러스가 유라시아 대륙을 건너고 대서양을 가로질러 쿠바까지 도착하는데 두 달 밖에 걸리지 않는다. 21세기에는 바이러스도 초고속 LTE로 움직인다.

나를 비롯한 외국인 친구들은 올 게 왔다는 태도다. 3월 동안 우리들은 매일 코로나 뉴스와 함께 살았다. 한국의 확진자 숫자가 매일 몇 백 명 씩 치솟고, 한국을 향하던 하늘길이 모조리 끊기고 있는 상황에 나는 지금 내가 꿈을 꾸나 싶었다. 아프리카 대륙과 카리브해에서 온 친구들은 안 그래도 취약한 자국의 의료 환경에 코로나 사태까지 덮친다면 재앙이 일어날 거라고 고개를 저었다. 이웃나라 이란의 긴급 상황을 체크하던 레바논 친구는 한숨만 쉬었다. 오직 쿠바인들만 느긋했다. (그들의 DNA에는 ‘릴렉스 진(gene)’이 전승되는 것인가……) 섬나라에는 바이러스가 못 온다는 쿠바 친구들의 낙관, 쿠바는 더워서 바이러스가 와도 다 죽어버릴 거라는 이웃들의 논리, 마스크를 쓴 우리들을 보고 이상하게 쳐다보는 거리의 시선에 이제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아도 된다. 잔소리하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마스크를 쓴다.

해완이 직접 만든 마스크!
마스크 건조중^^

상황이 긴박해지자 친구들 중 몇 명은 내게 코로나에 대한 자문을 구한다. 미안하다. 별 신박한 답변을 해줄 수가 없다. 의대생이라는 명패를 달긴 달았지만 2학년은 아직 의사 구실을 못하는 반푼이다. 하필 미생물학 수업에서 ‘바이러스’ 파트를 배우기 직전에 코로나 때문에 수업이 모두 취소되었다. (ㅠㅠ) 지금 내 머릿속에는 막 공부를 끝낸 따끈따끈한 기생충들만 들어 앉아 있다. 기생충과 바이러스는 우리 몸속에 산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들사는 세계의 규모는 은하계와 우리 동네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그 차이점에 근거해서 바이러스의 겉 테두리라도 더듬어보겠다.

바이러스, 생명의 집념

바이러스는 뭘까? 바이러스를 알려면 이 친구가 살아가는 미시적인 세계를 먼저 봐야한다. 우리가 살면서 병이 나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감염(infection)이다. 감염은 바깥에 살던 미생물들이 우리 몸속으로 침투했다는 뜻이다. 거대한 미생물 세계는 크게 세 가지 군으로 갈린다. 기생충, 박테리아(세균), 그리고 바이러스다.

감염성 미생물을 무조건 건강의 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미생물학에서 감염은 중성적인 개념이다. 즉, 감염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병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비피더스 같은 균은 신생아가 세상에 나온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아서 장(腸)을 침투하지만,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평화롭게 이 어린 친구와 평생 동거하는 사이가 된다. 이때 우리는 미생물이 ‘식민지 건설’에 성공했다고 말한다. 이 초기 정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빈 공간에는 유해한 미생물들이 기세등등하게 판을 친다. 이 아기는 앞으로 평생 약한 면역계를 끌어안고 골골거리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이런 유익한 미생물들에게 식민지 지배를 일부러라도 당할 필요가 있다.

뎅게바이러스는 이와 정반대다. 뎅게바이러스가 체내에 침투하는 순간 며칠 안에 반드시 몸 속 균형을 깨뜨린다. 바이러스는 모기의 침 속에 숨어 있다가 인간이 모기에 물리는 순간 피부 안으로 스며들어온다. 그리고 세포를 파고들면서 자신을 복제하기 좋은 환경을 찾는다. 생전 처음 보는 물질 앞에서 면역계는 서둘러 유전자 풀을 뒤져서 항체를 생산한다. 그렇지만 완성된 항체로 효율적으로 전투를 이끌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데, 그 전까지 면역계는 NK(Natural Killer)처럼 미리 훈련된 군인 세포들을 풀어서 뎅게에 감염된 세포를 닥치는 대로 사살한다. 바이러스의 복제를 억제시키는 물질도 분비한다. 이 모든 난리법석이 벌어지는 동안 새롭게 생성되는 화학 물질 때문에 몸의 온도가 올라가고, 관절처럼 체액이 고여 압력이 높아지는 곳에는 싸움의 증거로 통증이 생긴다. 이게 바로 뎅기열이다. 열대지방의 대표적인 감염성 질병이다.

비피더스균과 뎅게바이러스의 차이, 즉 공생이냐 전쟁이냐를 결정하는 요인은 뭘까? 첫 번째 열쇠는 미생물의 생존 방식이다. 이 미생물은 인간의 몸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영양분을 취하고 자기 복제에 성공하는가? 즉, 이 싸이클이 인간의 신진대사를 망가뜨리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지는가? 이 생존 메커니즘에 따라서 인생(人生)과 충생(蟲生)의 결합이 공생, 기생, 전쟁, 아니면 동반자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두 번째 열쇠는 인간의 면역계가 쥐고 있다. 면역계가 미생물에 대해서 ‘인내할 수’ 있느냐, 그럼으로써 파괴적인 면역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눈 감아줄 수 있느냐의 여부다. 면역 반응은 침입자를 파괴하지만 필수적으로 우리 신체도 함께 파괴한다. 그런데 면역 반응이 반드시 우리에게 해로운 물질한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가령, 간세포로 숨어들어가는 B형 간염 바이러스는 사실 세포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 이 둘만 놓고 보면 공생 관계가 가능하다. 그러나 면역계는 이 바이러스를 탑재한 세포를 인내하지 못한다. 적으로 여기고 곧바로 전쟁을 선포한다. (따라서 유년기에는 면역계가 몸에 해롭지 않은 여러 물질들에 대해 ‘인내심’을 익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멈출 줄 모르는 면역계의 폭주가 벌어진다. 그게 바로 자가 면역 질환이다.)

이처럼 미생물은 우리와 출생부터 죽음까지 쭉 함께 한다. 그래서 존재를 ‘다양체’라고 불렀던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은 백 번 보아도 옳다. 우리는 생명체지만, 우리 안에 사는 미생물들 역시 또 다른 생명체다. 생명의 기본단위는 먹고, 싸고, 자라고, 늙고, 자식을 낳는 ‘세포’다. 기생충은 다세포생물인데다가 진핵세포라서, 큰 틀에서 보면 섹스하고 사냥하고 이동하면서 우리와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물론 아메바처럼 단세포 원생동물들도 기생충에 속하기는 한다.) 박테리아는 단세포생물이고 원핵세포다. 원핵세포는 진핵세포와 달리 유전물질이 핵 안에 담기지 않고 세포질 속에 퍼져있다. 세포 분열로만 번식하는데, 그 대신 자기들끼리 DNA 조각을 주고받으면서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문제는 바이러스다. 바이러스는 세포가 아니고, 고로 생명도 아니다. 바이러스는 DNA 혹은 RNA으로만 이루어진 핵산 조각들이다. 단백질이나 탄수화물 같은 분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 핵산이 유전물질로서 제 기능을 다하는 것은 세포질과 핵 속의 수많은 단백질(효소)들이 극도로 섬세한 상호작용을 제공할 때만이다. 이런 동료들이 부재한 바이러스는 무생물 상태로 잠잠하게 여기저기 떠돌아다닌다. 이런 완벽한 환경을 제공하는 살아있는 세포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세포 안으로 파고들어간 바이러스는 갑자기 성격을 확 바꿔버린다. 잠재력을 만개시키며 열성적으로 자기복제를 시작한다. 세포라는 환경이 이 분자 조각에 생의 숨결을 불어넣은 것만 같다. 달리 말하면 바이러스는 세포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나노 크기의 ‘기생충’이다. 모든 생명체는 바이러스의 숙주가 될 수 있다. 인간은 물론이고 박테리아도 예외는 아니다. (미생물끼리도 이런 숙주-기생 관계가 형성된다.)

평소에는 죽어 있다가 생명체만 만나면 발작하듯이 깨어나는 존재. 생명체는 아니나 살아있는 존재. 바이러스는 마치 생명의 집념을 한으로 품은, 몸체를 잃어버린 유령처럼 보인다. 생명의 벡터가 DNA를 복제하여 후대에게 전해주는 연속성을 향하여 설정되었다면, 바이러스는 오로지 이 본능만을 뽑아내어 작동하는 기계다.

코로나 바이러스, COVID-19는 우리 면역계에 전쟁을 선포하는 바이러스다. 코로나는 당근과 채찍을 양손에 든 바이러스로 보인다. 당근이 낮은 치사율이라면 채찍은 막강한 전파력이다. 이른바 ‘넓고 얕게 가기’ 전략이다. 코로나 입장에서는 아주 유리한 생존조건이다. 숙주를 쉽게 죽이지 않으니까 더 많은 숙주로 옮겨갈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 (숙주를 죽이는 바이러스는 사실 실패한 바이러스다.) 그렇게 소수만 죽이는 대신에 죽음의 후보자들은 최대한 많이 고른다. 숙주가 되는 인간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다. 전 세계 인구를 70억이라고 어림잡고, 그 중 50%가 코로나에 감염된다고 생각해보자. WHO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코로나 사망률인 4%를 적용하면 총 1,400만 명이 죽게 된다. 확률로는 낮지만 절대수치로 보면 쿠바 인구보다 더 많은 숫자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랴? 코로나의 번식력은 인간의 생명력을 그대로 반영한다. 지난 한 세기 간 호모 사피엔스처럼 폭발적으로 번식한 종은 없다. 인간보다 더 맹렬하게 자기복제를 하며 지구 방방곡곡을 점령한 동물이 없다. 자기보다 더 ‘바이러스 같은’ 경이로운 생명체를 숙주로 삼은 코로나 바이러스는 얼마나 기쁘겠는가. 시대를 잘 타고 태어났다며 자축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뭐가 무서운 걸까

이 나노 크기의 ‘기생충’이 모두를 패닉에 빠뜨리고 있다. 이 패닉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지구에 더 이상 안전지대는 없다는 진실과의 대면이다. 내 방에 편안하게 앉아서 인터넷으로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폭격 사건을 검색하는 것, 최빈국에서 굶는 아이들의 사진을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과 코로나가 안겨주는 공포는 차원이 다르다. 가자 지구는 멀리 있지만 코로나는 나의 익숙한 세계를 침투한다. 어디로 도망갈 데도 없다. 비행기는 끊겼고, 이 동네나 저 동네나 코로나 불바다가 되고 있다. 코로나는 또 친절하게도 절대적으로 평등하다. 인종도, 지역도, 빈부도, 성별도 차별하지 않고 모든 호모 사피엔스들을 향한다.

나도 무섭기는 무섭다. 쿠바에서 아주 느리게 올라가는 확진자 숫자를 보면서 (현재 57명이다), 진단키트도 없는 이 나라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코로나 환자들이 숨어 있는 걸까 생각하다가 소름이 돋는다. 코로나에 걸려서 호흡곤란이 왔을 때 과연 가장 가까이에 있는 뽈리끌리니꼬에 산소호흡기가 있을까라는 불안한 의문도 따라온다.

하지만 이 공포의 근거가 100%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코로나는 분명 무서운 바이러스이지만 이것만큼 무섭고 만연한 건강 문제들도 많다. 영양부족, 중독, 가정폭력 같은 문제들 말이다. (코로나는 항체가 생기면 사라지겠지만, 매년 900만명의 사람을 죽이는 ‘아사’는 인류 역사 내내 사라진 적이 없다.) 어느 한국 의사도 이런 칼럼을 썼다. 사람들은 방호복을 입고 코로나 바이러스에 맞서 싸우는 의사들에게 환호를 보내지만, 이 수많은 방호복들은 결국 한 번만 쓰인 후 쓰레기가 될 것이다. 그렇게 환경 파괴의 원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훗날 인류에 가해질 위험은 코로나보다 기후 변화 쪽이 더 막강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환경 위기의 심각성을 제고하라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굼뜨게 반응한다. 빙하가 녹는 북극에서 고립되어 절망에 젖은 북극곰의 눈을 직시하는 것보다, 공기 중에 떠도는 눈에 안 보이는 코로나가 더 무섭다.

결국 코로나의 이름은 ‘코로나 바이러스’ 이상을 의미하고 있다. 안전지대가 제거되었다는 사실은 다음 몇 가지를 뜻한다. 첫 번째는 무지와의 대면이다. 생명 복제와 영생까지 운운하던 현대 의학이, 완전히 새로운 패턴의 병인을 맞아서 속수무책으로 얻어맞고 있다. 이 정도로 전파력이 센 녀석을 만나본 적이 없으니 방역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새롭게 나타난 변종이니 백신도 없다. 따라서, 코로나를 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드넓은 자연의 영역, 즉 무지의 크기가 얼마나 넓은지도 함께 보인다. 지식에 기반하는 현대 과학이 안전성을 보장할 것이라 믿었던 사람들로서는 현기증이 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신체에 대한 자각이다. 코로나를 넘어갈 수 있는 건 결국 내 몸, 이 몸뚱이 밖에는 없다. 신체를 미리 보호해줄 백신은 존재하지 않고, 빠르게 증가하는 환자를 모두 감당할 수 있는 의료 체계를 갖춘 나라도 드물다. (‘그’ 유럽이 무너졌다. 그 후 라틴 아메리카의 코로나 패닉은 더 커졌다.) 외부의 조건에 기대할 수 없다면 남은 대응책은 하나뿐이다. 면역계다. 림프구들이 유전자 풀을 샅샅이 뒤져서 신속하게 항체를 만들기를, 그리고 항체를 따라서 바이러스를 죽이러 다닐 대식세포와 NK세포가 평소에 잘 훈련되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의 문턱을 보게 될 것이다. 이로써 생과 사의 경계가 실체화된다. 그리고 통계상으로 생사의 확률이 96 대 4라 할지라도, 이 경계를 넘어가는 것은 오롯이 내 몸으로 해내야 한다. 포괄적인 신체보다는 파편화된 감각, 감정, 욕망과 더 친한 현대인에게는 더 겁나는 과제일 것이다.

마지막은 연결성이다. 나도 모르게 남에게 바이러스를 전파시킬 수 있고, 또 타인이 저도 모르게 나를 감염시킬 수 있다. 이 사실은 우리가 다 같이 살아가는 만큼 또 다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또 다른 사실을 내포한다. 지난 몇 십 년 간 인간은 지구촌 사회를 구성해서 서로를 최대한 가깝게 엮어냈다. 그러니 훗날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등장한다면, 인류는 좋든 싫든 다 함께 멸망하지 않겠는가? 나 홀로 살아남겠다는 마인드는 이제는, 정말로,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그 마인드는 평생 자가 격리 상태로 살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코로나 사태 앞에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패닉에 빠지고, 또 걱정을 나누며 위로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단순한 사실을 깨달았다. 역시 자기 목숨이 걸리지 않으면 사람은 문제를 잘 실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연대든 기생이든 적대든, 생존의 문제가 동시에 걸려있어야 형성될 수 있다. 그렇지 않는 이상 그 문제는 ‘내 문제 아닌 (남의) 문제’로 남는다. 이건 이기적이라고 비난 받을 게 아니다. 생명이 살고자 하는 것은 몸이 형성되는 순간부터 깃드는 본능적 운동이 아닌가. 모든 생명-체는 같은 운동을 공유하는 공동-체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공통의 운명을 인식하는 것은 대체로 죽음이나 그에 맞먹는 충격을 겪을 때다. 죽음을 실감할 때에야 우리는 지금 손 안에 쥐어졌다 흩어지고 있는 생도 실감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죽는다는 단순한 사실 앞에서, 사실은 수많은 문제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거꾸로 본다.

문제 앞에 ‘맨 몸’으로 맞서 본 경험이 적은 사람들은 세상의 다른 문제들에 접속할 수 있는 능력도 떨어진다. 안전지대에만 머물다보면 그게 세상의 전부인 줄 안다. 헌데 코로나는 네 달 만에 지구 상 인간들을 모두 안전지대 바깥으로 쫓아냈다. 흠, 어찌 보면 좋은 일일까.

쿠바의 상황

안전지대를 벗어난 지금 나는 좀 무섭다. 코로나 말고 먹는 사는 문제가 무섭다. 코로나 사태로 세계 곳곳에서 사재기가 벌어지며 마켓이 텅 빈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오는데, 나는 이 풍경이 별로 놀랍지 않다. 이건 쿠바의 일상적인 풍경이니까. 그런데 코로나 사태를 맞이해서 간소했던 선반은 더 텅 비어버렸다…… 오 쉣…… 그나마 음식이 있는 마켓은 구매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줄이 평소보다 세 배는 더 길다. 이러다가 마켓에서 코로나에 걸리게 생겼다 (ㅠㅠ).

주말마다 비교적 한산한 마켓을 돌면서 보이는 대로 식량을 사들였다. 평소에는 건강을 생각해 웬만하면 잘 사지 않는 삐까디요(정체불명의 고기가 다져진 덩어리)부터 비싸서 애써 눈길을 돌리는 치즈와 참치까지, 돈 생각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주워들었다. 불안해하는 룸메이트를 달래면서 우리는 먹을 거 걱정은 없을 거라고 확언했다. 이 확신은 어제 처음으로 동네마다 쌀이 떨어지기 전까지만 지속되었다. 세상에, 보데가에 쌀이 없다니! 내가 쿠바에 삼 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설탕과 쌀은 있었다. 계란이 실종되고 우유가 실종되어도 보데가의 쌀 포대자루는 뚱뚱했었다.

그때 처음으로 내 마음의 평화가 깨졌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아시아인이다. 쌀이 없으면 밥도 없고, 밥이 없으면 인생도 없다. 정육점에서 사온 돼지고기 사이에서 타이어 조각을 일일이 골라내는 수고는 감수할 수 있어도(쿠바에는 타이어를 도마로 쓰는 터프한 정육점들이 있다), 밥이 없어서 스파게티로 끼니를 잇는 수고는 거부하겠다. 오늘 마트를 돌다가 운 좋게 포장된 쌀을 3.5kg 산 후에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시세의 다섯 배 되는 가격이었지만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치를 수 있었다.

앞으로 학교가 한 달 동안 휴교를 해서 룸메이트와 칩거할 예정이다. 정 먹을 게 없으면 냉장고 비축분을 계산해서 조금씩 먹는 다이어트를 하자고 룸메이트에게 농담 삼아 말했다. 쌀만 있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연암이 이틀을 밥을 못 먹어서 기절하듯이 잤다가 빗소리를 들으며 깨어났을 때를 묘사하던 수필이 생각난다. 수필 내용은 생각이 안 나고 이 양반이 밥을 못 먹었다는 부분만 기억나서 마음이 짠하다. 세상에, 연암은 어떻게 주린 배를 잡고 글도 쓰고 공부도 했을까. 나는 양반은 못 되어서 밥은 먹어야겠다.

코로나 타임

20대에 진입한 후로 나는 기억나는 큰 사건을 세 번 겪었다. 첫 번째 사건은 세월호 사건이다. 그때 나는 핵 문제에 대해서 “언어로 담을 수 없는 문제이니 말하지 않겠다”며 침묵을 지켰던 (어떤 말보다도 더 강력한 반대의 메세지였다) 이반 일리히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논쟁거리보다 앞으로 갈 길을 제시하는 하나의 태도로 기억되고 있다.

두 번째는 브렉티스다. 그때 나는 세계2차대전이 끝난 이후로 전 세계에 공유되어 온 (최소한 ‘선진국들’이 적극적으로 공유해온) 가치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양성, 포용성, 교류와 소통, 이 모든 것들이 도전 받는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 가치들이 더 이상 다수의 생존 조건과 공존하지 못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다. 내가 그리고 있던 미래의 계획이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힐 줄은 몰랐다. 그리 먼 미래도 아니었고, 4월에 제프리를 보러 칠레에 가고 여름에 한국에 갈 때는 스페인을 다시 들려보겠다는 정도의 소소한 계획이었다. 나 뿐인가? 모두의 계획이 뒤집혔다. 판데믹(Pandemic)이 이렇게 쉽게 유럽의 국경을 뚫을 거라고는, 그리고 바이러스 하나로 21세기가 쌓아온 자산의 기반이 다 흔들릴 수 있다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평소에 밀어두었던 생사의 문제가 코앞으로, 전방위적으로 모두에게 들이닥쳤다. 코로나가 이렇게 들불처럼 번지는 마지막 바이러스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자, 갑자기 “무계획이 최고의 계획”이라는 <기생충>의 대사가 떠올랐다. 지금 필요한 건 계획이 아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말 그대로 지금 이곳의 일상을 지키는 것이다. 쌀을 찾고, 밥을 짓고, 친구와 나눠먹으며, 책을 읽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새 국면이 닥쳐올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인간이 세운 세계 속에 파묻혀서 생부터 사까지 안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코로나와 함께 흘려보내는 게 맞을 듯싶다. 자연 입장에서는 코로나가 인간이라는 지구의 기생충을 효과적으로 억제시켜주는 유익한 미생물이다. ‘코로나 타임’ 동안 중국발 미세먼지가 사라지고, 라틴아메리카 수도에 야생동물이 출몰하며 먹이를 물어간다는 뉴스를 보면 현재 인간 빼고 모두들 행복하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니까 너무 불행해하지 말고 이 시간을 통과하자. 쿠바 역시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어보려고 한다.

꽃이 만발한 쿠바, 해완의 학교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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