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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클래식]성숙한 자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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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0-05-07 19:42 조회1,4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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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자 ‘되기’



고영주(감이당)

  아이들은, 세계의 아이들은 / 무럭무럭 자라고 성장해야 한다 / 청소년이 키가 쑥쑥 나오면 /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한다 / 하지만 서른 넘은 성인이 / 해마다 키가 멈추지 않고 자란다면 / 축하가 아니라 병원부터 데려가야 한다 / 그가 계속 더 성장해야 한다고 날뛰면 / 정신병원으로 데려가 봐야 한다 / (……) / 멈출 때를 모르면 성장이 죽음이다 / 그리하여 성숙이 참된 성장이다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성숙이 성장이다」, 2010, 느린걸음, p449~450)

<이것임>과 마주하라!

나는 Mold Base라는 제품을 생산하는 금형 회사에서 근무한다. Mold Base? 겨울철 별미인 붕어빵을 생각해보자. 붕어 모양의 틀에 찹쌀 반죽과 팥을 넣은 다음 노릇노릇해질 때까지 불에 구워내면 맛있는 붕어빵이 완성된다. 이러한 원리로 휴대폰, 자동차, 화장품 등 똑같은 모양의 플라스틱 제품을 수만 개 씩 찍어낼 수 있는 틀이 바로 Mold Base다. 어떠한 것을 넣어도 같은 모양 외에 다른 것이 나올 수 없는 ‘불변’의 법칙을 가진 제품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 Base를 판매하는 영업부에서 일하고 있다. Base를 구매하는 고객과의 신뢰가 중요하고, 철저한 채권과 채무관리를 해야 한다. 제품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원치 않는 접대자리도 가야하고, 부실채권 고객에게는 사채업자 못지않게 돈을 받으러 달려들어야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회사 내부에서는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데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온갖 눈치싸움과 정치질에 능해야지만 높은 곳까지 승진할 수 있다. 회사의 ‘이익’과 자신의 ‘성장 욕구’만을 위해 질주하는 영업부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같은 모양으로 찍혀 나오는 수만 개의 플라스틱 같다. 만약 이 모습으로 30년을 산다면 ‘신체’와 ‘정신’은 어떻게 될까.

  어느 계절, 어느 겨울, 어느 여름, 어느 시각, 어느 날짜 등은 사물이나 주체가 갖는 개체성과는 다르지만 나름대로 완전한, 무엇하나 결핍된 것 없는 개체성을 갖고 있다. 이것들이 <이것임>이다.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2003, 새물결, p494)

‘어느 날’ 이사님이 뇌졸증으로 쓰러지셨다. 퇴근 후 동료들과 급히 병원으로 갔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응급실에서 나오시는 이사님의 모습은 이미 한 부서를 이끌고 갈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순간 ‘나도 몇 십 년 후에는 저렇게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두려웠다. 한동안 이사님의 공석을 두고 영업부가 시끄러웠고, 며칠 뒤 회사는 이사님의 퇴직을 결정했다.(회사 고위직은 전부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것임>이라는 아주 모~호한 개념으로 ‘-되기’의 문을 연다. <이것임>이란 ‘사물’이나 ‘주체’가 갖는 고정되고 불변의 개체성(성질)과는 달리 ‘사건’을 동반한 개채성이다. 어느 계절, 겨울, 여름, 시각, 날짜, 어느(……). 기억에도 흐릿하고, 손으로 잡히지도 않지만 ‘존재’는 순간순간마다 뚜렷한 사건과 마주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이사님의 몸은 병들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왜 진작 몸의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나 역시 마찬가지다. 병원에서 이사님의 모습을 보고 분명 두려움을 느꼈다. 그럼에도 왜 성장 욕구를 멈추지 않았던 것일까. <이것임>이 사건이 되려면 내 ‘신체’와 ‘정신’이 그 때를 알아차려야 한다. <이것임>이 모~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나’라는 존재가 늘 마주하고 있는 <이것임>이 사건화되지 못한 채 흘러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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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역행’이다

내 몸의 <이것임>을 알아차린 것은 작년(2019년) 12월이었다. 출근을 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내 몸은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눈앞이 어지러웠고, 누군가가 뒤에서 목을 조르는 것 같이 답답했다. 특히 명치 한 가운데 뭔가가 딱딱하게 굳어 있어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는 급히 회사에 연차를 내고 병원으로 갔다. 몇 가지 검사를 받았고, 의사는 “야식이랑 폭식하시죠? 술 많이 드시죠? 앞으로 계속 이런 식으로 먹으면 고지혈증, 고혈압, 당뇨가 금방 올 거예요.”라는 소견을 내놓았다. 당장 특별한 병에 걸린 것은 아니었지만 내 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병들어가고 있었다.

  되기는 역행적이며, 이 역행은 창조적이다. 퇴행한다는 것은 덜 분화된 것으로 향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역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선을 따라, 주어진 여러 항들 “사이에서”, 할당 가능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는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는 일을 가리킨다.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p453~454)

<이것임>으로 ‘-되기’의 문을 열었다면, 그 다음은 ‘역행’으로 변화의 문턱을 넘을 차례다. 역행이란 기존과는 전혀 다른 ‘신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내 몸이 병들어 가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냥 이대로 살 것인지, 아니면 몸을 고치기 위해 삶의 ‘속도’와 ‘방향’을 바꿀 것인지.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내가 넘어야 할 가장 시급한 변화의 문턱은 바로 ‘식욕’이었다.

나는 이전에 『천개의 고원』으로 ‘다이어트와 기관 없는 몸체’를 쓴 적이 있다. 그 때는 단순히 폭식과 복근에 대한 환상이 주제였다. 예전 같았으면 며칠 바~짝 굶고, 잠시 운동에 미쳤다가 또 다시 식욕에 사로잡히는 패턴을 밟았을 것이다. 만약 이 패턴을 또 다시 반복한다면 그것은 변화의 역행이 아닌 ‘퇴행’을 향해 가는 것이다. 역행이 변화의 시작인 반면 퇴행은 ‘부동(不動)’과도 같다. 부동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삶의 운동과 정지가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내 몸에 나타난 <이것임>은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속도와 방향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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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내 식욕을 자극하는 음식들을 살폈다. 그리고 그것들을 대체할 만한 음식들을 찾았다. 돼지고기는 계란으로, 짜고 달콤한 음식들은 오이와 양상추 등 채소로 대체해서 먹었다. 처음 며칠은 너무 힘들었다. 잠도 오지 않았고, 몸이 바짝바짝 타는 것 같이 예민해져 갔다. 특히, 나는 탄수화물 중독이었는데 밥 대신 고구마로 끼니를 해결할 때마다 포기하고 다시 예전처럼 먹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그럼에도 지난 4개월간 나는 내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음식들을 체크하며 꾸준히 식습관을 바꿔나갔다.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존재와 관계 맺는 ‘항’들과의 거리를 잘 재야한다고 말한다. 식욕과 가까워지지도 않아야 하지만 멀어지지도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욕망은 기존의 패턴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음식과 멀어졌지만, 대체된 음식을 정신없이 먹어 치우는 내 모습을 보았다. 결국 무엇으로 대체하든 음식과 할당 가능한 만큼의 관계를 맺지 않으면 식욕을 제어했다 할 수 없다.

  되기(=생성)는 결코 관계 상호간의 대응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사성도, 모방도, 더욱이 동일화도 아니다. (…) 그리고 특히 되기는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 되기는 완전히 실재적이다.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p452)

식습관을 바꾸는 것과 동시에 가벼운 운동을 병행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내 신체가 변해가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명치에 뭉친 딱딱한 덩어리도 없어졌고, 머리도 어지럽지 않았다. 웬일인지 환절기 때마다 앓았던 비염도 걸리지 않았다. 가장 신기했던 것은 점점 줄어가는 몸무게였다. 식습관 하나 바꿨을 뿐인데 3개월 후 몸무게가 무려 10kg이나 줄어든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되기’는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 현실에서 일어나는 실재라고 말한다. 마술이나 마법으로 내 몸이 변한 것도 아니고, 약으로 병을 치료한 것도 아니다. ‘-되기’는 ‘완전한’ 건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해지는 ‘과정’을 관찰하고 느끼는 것이다. 식욕조절을 꾸준히 하면 할수록 하루하루 몸이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문제가 되는 것은 조직화가 아니라 조성인 것이다. 발전이나 분화의 문제가 아니라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문제.”(「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p484)

존재는 유동한다

내 몸이 변해가는 기쁨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마음 한편에는 ‘관계’의 결핍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식습관을 바꾸다 보니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제한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회사 회식자리와 친구들과의 모임을 어쩔 수 없이 거절해야만 했다. 사실 그동안 친구들과의 술자리는 내 삶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그리고 회식만큼 회사 상사들에게 내 모습을 어필할 수 있는 자리도 없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정기적 만남들을 하나 둘씩 거절하면서 그들도 조금씩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지금은 아예 연락조차 없다…) 그 때 알았다. 아! 내 식욕은 단순히 먹는 것만이 아니라 주변 관계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그동안 먹고 마시는 것으로만 관계를 맺어왔다는 것을… 배고픔 못지않게 외로움과 공허함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내 마음에 쌓이는 결핍감은 내 신체가 겪은 <이것임>만큼이나 심각했다.

  생성은 누군가가 가진 형식들, 누군가가 속해 있는 주체, 누군가가 소유하고 있는 기관들, 또 누군가가 수행하고 있는 기능들에서 시작해서 입자들을 추출하는 일이다.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p517)

생성이란 누군가가 가진 형식을 나만의 형식으로 재창조하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간혹 ‘훔치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내가 하고 있는 공부는 고전에 등장하는 주체들, 그들이 갖고 있는 기능과 기관들을 훔쳐 나만의 언어로 리-라이팅하는 것이다. 작년에는 감이당에서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느라 조금 외로웠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올해는 많은 선생님들과 함께 고전을 읽고 리-라이팅하는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리-라이팅 만큼이나 나를 압박해 온 것은 <주역周易>이었다. 한 주에 2괘씩 암기를 하고 시험을 보는 것은 주역을 처음 배우는 나에게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거기다 조원들의 따뜻한 격려와 개입(^^)이 내 일상에 침투하면서 관계로 인해 생긴 결핍을 느낄 틈 없이 바빠졌다. 『천개의 고원』에서 ‘-되기’는 삶의 형태다. 삶이란 살아감과 죽어감이 동시에 작동하는 ‘시-공간’이다. 그래서 ‘-되기’는 언제나 ‘이중적’인 과정의 형태로 나타난다. 몸이 변하고 건강해지는 것과 마음에 쌓이는 결핍감 모두를 ‘긍정’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되기’라 할 수 있다. 힘들긴 하지만 암기와 글쓰기를 수행할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 결국 기존과 다른 신체를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삶 전체의 방향과 속도를 바꿔야만 했던 것이다. 만약 올해 장자스쿨에서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외로움과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또 다시 식욕에 포획되고 말았을 것이다.

주역과 『천개의 고원』이 갖고 있는 공통된 입자는 모든 존재는 ‘변하고 바뀐다’는 것이다. 천지 만물은 끊임없이 변한다. 마찬가지로 존재도 끊임없이 유동한다. 나아감과 멈춤의 때를 아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자 ‘성장’이다. 그리고 이 성장을 멈추지 않는 것이 진정한 ‘성숙한 자-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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