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클래식]에이해브, 광기의 이단아 (2) > MVQ글소식

MVQ글소식

홈 > 커뮤니티 > MVQ글소식

[청년 클래식]에이해브, 광기의 이단아 (2)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0-05-27 10:14 조회1,436회 댓글0건

본문





에이해브, 광기의 이단아 (2)


오찬영 (감이당 장자스쿨)
(전편에 이어서)

에로스에서 타나토스로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다. 에이해브의 광기는 정점을 찍은 뒤 바로 하강하는 선분이다. 물마루의 정점에 선 자는 반드시 추락한다. 이 추락이 바로 소멸의 타나토스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것을 저주하고, 파괴하며, 곧 다가올 정점 이후의 허무를 무의식적으로 감지하는 악몽에 계속 시달린다. 이 흐름을 잘 생각해봐야 한다. 강력한 에로스적 충동의 결과물은 타나토스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모든 것이 필멸할 뿐이며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에 도달하는 것 말이다. 왜 펄펄 들끓는 에로스는 타나토스의 검은 재로 산화하고 마는 것일까? 모든 철학적 탐구의 끝은 그 시작의 생생함을 다 잃어버린 채 시들시들한 풀꽃처럼 맥없이 끝나버리는 결말로 귀결되는 것일까?

에이해브가 <모비딕>을 통과하며 그려내는 상승->정점->추락 국면과 가장 쉽게 치환되는 장면은 바로 섹스 혹은 오르가즘이다. <모비딕>이 은근하게 품고 있는 성적 은유들, 특히 에이해브에게 집중되어있는 섹슈얼한 메타포에 주목하라. 미국 드라마로 영어공부를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모비딕>이라는 제목에서부터 단서를 눈치챘을 것이다. Moby는 ‘제일 큰, 거대한’이라는 뜻이고, Dick은 남성의 페니스를 뜻하며 미국의 일상 대화에서 속어로 많이 쓰이는 단어다. 한 마디로, 이 책의 제목은 거대한 음경, 대물이다. 이는 뱃사람들이 시시덕거리며 재미 삼아 붙인 별명 그 이상이다. 에이해브가 사실 고래에게 왼쪽 다리를 잃은 것뿐만 아니라 거세되었다고 추측하는 해석이 평론가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이 책의 서사는 남근적 정복욕을 고래잡이로 풀어쓴 것이다. 신체의 일부를 잃은 자가 자신이 잃어버린 바로 그 물건(!)을 상징하는 고래에게 달려드는 것. 마치 하나의 퍼즐 조각이 자신에게 없는 조각을 찾아 온전한 도형을 이루려고 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래서인지 유독 에이해브는 ‘하나 됨’을 갈구하는 언어를 종종 구사한다. 기꺼이 그대와 융합하겠다!(허먼 멜빌,『모비딕』, 작가정신, 603쪽)”, “나는 도가니를 구해서 그 안에 들어가 녹아버리고 싶다그래서 작고 간결한 하나의 등뼈가 되고 싶다(같은 책, 564쪽) 가장 압권은 그가 죽음의 순간에 최후로 내뱉은 말이다.

나는 너에게 달려간다나는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겠다. (…) 빌어먹을 고래여나는 너한테 묶여서도 여전히 너를 추적하면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겠다그래서 나는 창을 포기한다!”

(허먼 멜빌,『모비딕』, 작가정신, 682쪽)

whale-2998812_640

고래를 잡으려면 우선 작살을 던져 고래에 올라타 자리를 확보한 후, 긴 창을 들고 고래의 몸속 깊숙이 찔러 넣어 휘저으며 심장을 터뜨려 죽이는 것이 고래사냥의 순서다. 하지만 에이해브는 모비딕을 죽이려는 그 순간에 창을 포기한다고 외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대체 왜 가장 마지막으로 내뱉었던 에이해브의 단말마가 그토록 꿈꿔왔던 모비딕을 죽이지 않겠다는 외침이었을까? 그가 창을 포기한 것은 절정 직전에 멈추겠다는 선언이다. 싸움과 긴장, 투쟁의 최고 정점을 눈앞에 둔 자의 격렬한 흥분을 멈추지 않으려는 것이다. 에이해브는 직감하고 있다. 물마루의 정점에 올라선 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마는 오르가슴의 원리를. 그렇다면 이 쾌감의 절정을 최대한 유지 시키는 방법이 있다. 성교 중의 남자가 사정을 직전에 참아내듯, 절정 직전에 멈추는 것이다. 에이해브의 유언은 섹슈얼한 은밀함과 정복의 신체성을 너무나 뚜렷하게 보여주기에 독특한 여운과 기이함을 남긴다. 도대체 이런 정복과 합일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쾌감은 어디서 비롯될까?

아포칼립스, 종말을 갈구하는 아메리카적 열정

모비딕과의 결투를 앞두고 소설은 기묘한 장면들이 마구 교차 되며 불길한 복선을 한껏 고조시킨다. 예지력을 가진 동료의 횡설수설, 온갖 동물과 자연 현상이 던져주는 경고들은 하나같이 피쿼드호의 파멸과 종말을 가리키는 표식들이다.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스펙타클한 에이해브의 선분은 독자로 하여금 할리우드 영화들이나 소설의 주된 소재인 ‘아포칼립스(Apocalypse: 종말)’적 장면들을 교차시키게 만든다. 온갖 좀비 떼들의 출현, 느닷없이 지구로 돌진하는 소행성, 지구 위의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북극 한파까지, 할리우드의 스케일은 얼마나 파멸과 종말을 극적으로 상상하는가에 좌우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 군상들의 경악스러운 아귀다툼, 드라마틱한 감정들의 폭발과 혼돈, 한마디로 이 모든 광기적 씬을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는 플롯은 종말론 위에서나 가능하다.

city-2444516_640이 모든 광기적 씬을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는 플롯은 종말론 위에서나 가능하다.

그래서 종말론의 눈으로 모비딕을 읽어보면, 고래와의 결투를 클라이막스로 설정한 미국식 종말주의 분투를 새롭게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에이해브를 포함한 선원들은 모비딕을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가며 점점 고조되는 파멸의 힌트를 감지한다. 하지만 이는 에이해브를 더욱 날뛰게 만들 뿐이다. 마치 바이올린 현을 끝까지 감은 듯한 팽팽한 긴장이야말로 에이해브가 자신의 에로스적 힘을 폭발적으로 확장시키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확장의 끝은 타나토스와 맞닿아있다. 상승의 선분은 점점 치솟으며 절정의 단 한순간을 위한 예비 폭탄으로 차곡차곡 쌓인다. 나는 지금 가장 높은 물마루에 도달한 바도 같은 기분일세.(같은 책, 672쪽) 그가 만들어낸 높디높은 물마루는 그동안의 항해 과정에서 자신의 모든 생명력을 쏟아부어 세워 올린 것이다. 마침내 꿈속에서도 찾아 헤매던 모비딕을 만났을 때 창을 꽂지 않겠다는 그 최후의 고함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에이해브의 신체성은 완전한 합일을 추구하며, 합일 직전, 즉 끝에 거의 도달했다는 쾌감만이 그를 충동질한다. 에이해브가 모비딕을 정복하고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기독교의 종말론은 신의 섭리가 현실 세계를 완전히 장악하며 일치된 세계이기 때문에 종말이 곧 구원으로 연결된다. 작금의 현실은 사탄의 휘하에 놓여 있기에 아주 부정하고 비정상적이며, 이 때문에 지구상의 모든 것이 멸망한 뒤 세워질 천년왕국으로의 소망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종말론은 서양의 비종교인들에게도 뿌리 깊게 내재되어 있는데, 현재를 싹 갈아 엎어버릴 이상적 세계를 상정하는 것은 그들의 사유 패턴에 있어서 기본적인 대전제다. 독일의 신학철학자 야콥 타우베스는 간단하게 정리한다. 서양 근대철학에 있어서 ‘진보’란 한마디로 세속화된 종말론이라고. 근대철학이 실패한 이유는 종말론의 불길을 꺼뜨림으로써 인간의 본질적인 진보 정신을 쇠퇴시켰기 때문이라고.

지난해 2019년 12월 28일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기해년 장자스쿨이 마지막으로 4학기 에세이를 발표하는 토요일이면서,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지구 멸망을 예고한 날이기도 했던 것이다. 운명의 그 날, 우리가 겪었던 하루를 말해보자면, 멸망의 순간은 당연히 오지도 않았거니와, 감이당에 모인 장자스쿨이 평화로운(!) 글 발표를 했으며, 왁자지껄 회식을 하고 저녁 내내 수다를 떨며 하루를 마무리했다는 것? 그 정도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토요일이 그렇게 있었던 듯, 없었던 듯 지나가 버렸다.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bridge-10820_640여느 때와 다름없는 토요일이 그렇게 있었던 듯, 없었던 듯 지나가 버렸다.

일상은 변함없이 계속되고,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는데, 종말 예언이야말로 왜 멸망하지 않고 늘 업그레이드 되어 자꾸만 출현하는 것인가? 기독교 사상에서 최후에 대한 예언은 늘 유효하다. 종말은 마치 캘린더에 붉게 적혀 예약된 디데이처럼 기독교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개봉을 예고하는 티저는 범람하는데, 본편은 나올 생각도 않는 영화와도 같은 게 종말론이다. 종말이라는 마지막을 설정하고 그 위로 달려가는 직선적 시간관이 주는 쾌감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종말론에서 본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티저일지도 모른다. 그래야 사람들이 ‘일어서기’ 때문이다. 발기한 남근처럼. 최후의 최후를 계속해서 상상할 것, 더 세게, 더 강하게!

결국 기독교 신도들과 에이해브의 차이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의 유무일 뿐, 그 신체적 리듬의 움직임과 감정의 패턴은 동일하다. 허먼 멜빌은 좀비나 소행성 같은 설정 없이도 바다 위의 포경선 한 척에 미국인들의 종말주의적 신체를 완벽히 구현해냈다. 미국의 상징인 슈퍼맨이나 어벤져스 같은 히어로들은 종말론을 내재화한 신체만이 탄생시킬 수 있는 캐릭터들이다. 에이해브는 어쩌면 슈퍼맨을 빌런(villian)화시킨 미국의 원조 히어로일지도 모르겠다. 미국적인, 너무나 미국적인! 따라서 에이해브의 도주선은 합일과 소유라는 좌표에 포획되어 에로스의 선분에서 타나토스의 점으로 주저앉는다. 가장 극적인 종말에 대한 감지가 삶을 극한으로 추동시키는 이 아이러니, 가장 크게 아니오를 외치는 도주선이 오히려 그 이전과 같아져 버리는 역설!

삶으로 흐르는 철학을 위하여

이쯤 되면 종말론이 불러일으키는 남근적 열정에 아주 진저리가 쳐진다. 삶이 없는 진보, 죽음을 향한 희망. 이 말이 도대체가 성립 가능한 것이란 말인가? 삶을 몽땅 이 위대하고 화려한 여정, 그 이후가 과연 무엇일지 진지하게 살펴봐야 한다. 광기와 폭력의 에너지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아슬아슬한 상태의 신체는 사실 무력할 뿐만 아니라 무감(無感)하다. 에이해브도 마찬가지다. 흰고래 외에는 눈에 뵈는 게 없다. 결국 내가 에이해브에게 끌렸던 이유 역시 한 겹 들춰보니 가장 종교적인 배치의 연장 선상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기에, 그토록 추구했던 절대자에 대한 ‘아니오’의 선언은 전혀 새로운 철학이 아니었다는 것이 중간 결론이다. 아니, 어쩌면 에이해브에 대한 분석이 새로운 스타트 지점으로 나를 데려다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른 배치는 어떻게 가능할까? 소멸과 합일의 타나토스가 아니라 계속된 선분을 그릴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이제부터의 미션은 이러하다. 살려야 한다! 무엇을? 삶을, 지금 이 순간을, 에로스를!

flower-2919284_640살려야 한다! 무엇을? 삶을, 지금 이 순간을, 에로스를!

(계속)





logo-01.png

▶ 배너를 클릭하시면 MVQ 홈페이지에서 더 많은 글들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