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신선(도교)는 그 자체로 이단(?)이니 일단 괄호 쳐 놓겠습니다. 논의가 불가해서가 아니라,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참으로 기운이 뻗치시고 재능이 막강하시고 관심이 다양하셨구나… 생각해도 괜찮습니다. 실제 양명학은 불교와 상당부문 통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주자학 쪽에서 양명학을 ‘심학(心學)이라고 부를 때 그 명칭은 불교에 가깝다는 멸칭입니다.
그런가 하면 도교는 중국 민간 신앙을 폭넓게 받쳐주는 고유의 신앙 체계입니다. 핵심은 일단 양생(養生)인데, 양명은 도교의 정좌 수행을 오래 경험했고 실제로 효험도 크게 보았으며 한때 크게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도교적 수행이나 삶의 감각들이 유학자들의 생활과 배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선 같은 경우에는 유학이 도드라지면서 불교가 정면으로 배척되었고, 도교는 애초에 크게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게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전근대 시기 중국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기 동안 유불도 삼교가 마치 솥의 세 다리처럼 힘을 나눠가지는 형국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배경과는 별도로,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공식적으로 사대부 가문의 전도 앙망한 청년이 중독에 가까운 불교생활 도교 생활을 한다는 건 확실히 특이한 사실입니다. 그러니 담약수도 그걸 지적했을 거구요.
임협은 협기 즉 의협심입니다. 좋게 말하면 의기로운 청년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청년시절의 다섯 가지 탐닉 혹은 중독이라는 전체 국면에서 보면 의기롭긴 의기로운데 지나치게 의협에 빠져있었다는 뜻입니다. 지나치게 의롭다는 건 어떤 정도일까요? 우리에게도 ‘의리-‘ 하는 연예인도 있고 합니다만 좀 희화하자면 그런 겁니다. 양명의 연보 등을 보면 초년 시절에 동네 친구들과 군대 병정놀이 같은 걸 했다 하고, 또 과거 급제 후 중앙 관료로 처음 배정된 공부(工部)에서 건설 현장 부역민(!)들을 군대 병영의 조직처럼 운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일관성이 있습니다. 환관 유근과 같은 인물에 저항하는 것도 어찌 보면 생래적인 반응이었을 수 있습니다. 태생적으로 의협 근육 같은 게 있어서 불의를 보면 꿈틀대는 뭐 그런 것 말입니다.
기사의 기(騎)는 말타기이고 사(射)는 활쏘기입니다. 그러니까 말타기에 능하고 활을 잘 쐈다는 뜻입니다. 이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상당히 왕성하고 거친 활동력에 바탕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엄청난 공을 들여야 가능한 각각의 전문분야이고 한 마디로 또 다른 ‘세계’입니다.
말을 탄다는 것은 자동차에 비견할 만하지만 사실 전혀 다릅니다. 요컨대 말의 생명성을 빼고 이동성만 놓고 볼 때 일견 가능한 비유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이해했다간 정확하게 빗나갑니다. 말은 생물입니다. 말 잘 듣고 인간에 길들여진 만만한 가축처럼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말은 예민하고 고고한 동물입니다. <걸리버여행기> 보세요, 휴이넘편을 보면 구제불능 말종 생물 인간=야후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품행방정 고고한 휴이넘=말들의 세계가 있지 않습니까.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말을 탄다는 것은 일단 말안장, 말고삐, 발걸이 등등 마구(馬具) 일체를 갖추어야 하고(매일 설치해놓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탈 때 일일이 하나하나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말과 교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