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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리포트]코로나를 ‘뻬스끼사’ 하라(2) -커뮤니티, 바이러스를 걸러내는 마법의 필터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20-06-15 13:46
조회 : 341  


코로나를 ‘뻬스끼사’ 하라(2) -커뮤니티, 바이러스를 걸러내는 마법의 필터



김 해 완

지금 나는 내 구역 주민들의 이름을 거의 다 외웠다. 이름뿐인가. 몇 명이 한 집에 사는지, 연령대는 어떠한지, 친하게 지내는 이웃은 누구인지, 가족 분위기는 어떠한지도 대충 알게 되었다. 두 달이면 충분한 시간이었다. 매일 동일한 내용을 필사하는데다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얼굴을 보기 때문이다. 이제 주민들도 나와의 거리가 좀 가까워졌다고 느끼는지, 어떤 할머니들은 커피를 건네거나 나를 붙잡고 아침 수다를 떠신다. 습하고 끈적거리는 날씨를 피해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나로서는 좀 곤란하다. 그래도 호기심 때문에 떠나지 못할 때가 더 많다. 6호 아파트 할머니의 아들은 에콰도르에 살면서 약을 보내주는데 지금 국경이 막혀서 곤란해 한다. 생화학 연구소에서 일하는 13호 아주머니는 혹시라도 코로나바이러스를 집으로 묻혀올까 봐 걱정한다. 8호 할머니 딸은 베다도에 하숙집을 운영하고 있는데 지금 장사가 안 되어서 전전긍긍한다. 집을 찾고 있는 참한 학생을 모르냐면서 나에게 은근하게 영업하는 중이다.

접촉의 사회

두 달 전에는 주민들과 생판 남이었던 나의 정보력이 벌써 이만큼 늘었다. 그렇다면 몇 십 년 째 붙어 살고 있는 주민들은 자기들끼리 얼마나 가까울 것인가? 쿠바인들은 웬만해서는 이사를 안 간다. 대중교통이 끊긴 현재 의대생들은 모두 집에서 도보 가능한 동네 뽈리끌리니꼬에 출석하고 있는데, 이번 기회에 내가 알게 된 동네 의대 친구들을 보면 대부분 여기서 태어났다. 얘네도 결국 주민이라는 소리다. 같이 뻬스끼사를 다니다보면 골목에 들어설 때마다 다른 주민들과 인사하는 걸 기다려줘야 한다. 뻬스끼사 본연의 업무에 잡담이 끼얹어질 수밖에 없다. 이웃집 숟가락 개수까지 다 알 수 있다는 말이 우스개소리로 나온 게 아니다. 이런 사회에서 살다 보면 정말 그렇게 될 것 같다.

옆집 사람이 내 주방의 숟가락 개수를 안다는 것은 좋은 일일까? 글쎄다. 서로 아는 만큼 의지가 될 테지만, 또 개입하는 만큼 부담스러울 것 같다. 물리적 거리가 가까우면 심리적 거리도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심리적 거리가 가깝다는 말의 의미는 접촉을 허용할 공간을 열어둔다는 것이다. 멀어진 마음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잡음도 없고 불편함도 없겠지만 대신 심심하고 허하다. 그와 반대로, 심리적 거리가 가까우면 기꺼운 접촉부터 괴로운 접촉까지 벌어질 가능성이 동시에 커진다. 사생활 침해처럼 과격한 접촉, 배려 있는 사랑스러운 접촉, 강제성을 띠는 집단적 접촉…… 인간은 이래도 저래도 만족을 잘 모르는 동물이다. 홀로 있을 때에는 고독을 견디기 어렵고, 같이 있을 때에는 타인을 견디기 어렵다. 전통적인 공동체의 틀이 흐려지고 있는 한국에서는 새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감을 얻지만, 공동체를 떠나서 사는 게 불가능한 사회에서는 이 때문에 숨 막히는 기분도 든다. 결국 이런 일상의 ‘거리 두기’에 정답은 없다. 세상에 천라만상의 사람들이 산다면, 그들이 사는 사회의 모습도 천차만별인 건 당연하니까.

그런데 이번 코로나 사태 앞에서 지구의 호모 사피엔스들은 긴급 미션을 받았다. 무조건 접촉을 줄이라는 것이다. 개체 사이에 거리를 벌리라는 것이다. 안 그러면 다들 이 발 빠른 바이러스에게 당할 것이다. 이런 거리 벌리기가 얼마나 극단적이었는지, ‘각자도생’이 유행한지 한참 된 한국에서도 외롭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사태 초반엔 쿠바 내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웅성거렸다. 개인주의를 앞내세우는 나라들도 이 미션 앞에서 쩔쩔 매는데, 접촉을 사랑하는 사회인 쿠바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쿠바 정부는 큰 틀에서 사회적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코로나 대응법의 대전제를 따랐다. 대중교통과 고속도로를 가로막아서 주민들을 거주지에 고립시켰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쿠바의 기본 인사법인 ‘베소(볼 키스)’는 물론이요, 습관적인 포옹도 절대로 안 된다고 끊임없이 강조했다. 그러나 이것이 커뮤니티에서 매일 벌어지는 일상적 접촉까지 멈췄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다. 이것이 삶이 굴러가는 기본 틀이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의 익명성을 해체하라

두 달이 흐른 후 나는 다시 물었다. 쿠바처럼 밀접한 커뮤니티 기반의 사회는 코로나바이러스에 더 취약할까?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 안전해진다는 이론이 맞다면, 그게 유일한 답이다. 그러나 내가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얻은 결론은 달랐다. 리스크는 변함없었다. 하지만 커뮤니티란 인구 숫자와 그 수에 비례하는 위험성으로 단순하게 환원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커뮤니티에 사는 사람들도 가만히 앉아서 바이러스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물이 아니었다. 커뮤니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살아 있는 커뮤니티는 바이러스의 위험을 일차적으로 걸러내는 필터 역할을 해낸다.

작은 커뮤니티가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바이러스의 익명성을 해체하기. 바이러스는 인체에 병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숙주의 이름까지 지워버리는 힘이 있다. 이것이 전염이라는 현상의 특징이다. 전염의 물결 속에서는 행위의 주체와 객체가 불분명해진다. 전파자가 원해서 바이러스를 얻은 게 아니니 그 역시 피해자다. 확진자 역시 곧바로 전파자가 될 수 있으므로 그 역시 가해자다. 이 가운데에서 진정한 행위의 주체는 바이러스겠지만, 바이러스라는 존재는 오로지 사람을 통해서만 실재하기 때문에 따로 분리해서 인식하는 게 불가능하다. 사람과 바이러스를 분리할 수 없다는 조건 때문에 감염자들에게는 ‘반인반수(半人半獸)’도 아닌 ‘반인반균’이라는 새 지위를 부여된다. 감염이 어디서 어떻게 올지 모른다는 정보의 공백 때문에 경계 범위는 ‘모든 타인’으로 넓혀진다. 개인의 의도와 상관 없이 누구든 말려들어가기 쉬운 전염병 속에서는 하나의 익명만 남는다. 확진자 n번.

그런데 쿠바처럼 모두가 모두를 아는 동네에서는 이런 복잡한 게임이 불가능하다. 정보의 공백이 생기기에는 서로 삶이 너무 촘촘하게 얽혀 있고, 이웃을 ‘확진자 n번’으로 취급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알아버렸다. 가령, 앞집에 사는 ‘페르난도’가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렸다고 치자. 이제 큰일 났다. 딱 봐도 그제 스페인에서 왔다가 격리 당한 사촌을 도와주러 갔다가 바이러스를 얻어온 것 같다. 혹시 나도 걸린 게 아닐까 걱정이 앞선다. 이런 걱정 속에서도 페르난도는 페르난도로 남는다. 십 년 넘게 이웃으로 알고 지내면서 농담과 먹거리를 주고 받은 사이인데, 그 시간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 해서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바이러스가 ‘페르난도의 바이러스’라는 새 특징을 얻게 된다. 그냥 COVID-19가 아니라, ‘술을 좋아하고 어린 딸을 사랑하고 어제 우리 집에 망고를 선물했고 요즘 일자리가 없어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페르난도에 탑재한 COVID-19’가 된다. 이 바이러스가 무사히 떠나야 페르난도의 어린 딸도 슬퍼하지 않고, 망고도 다시 선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커뮤니티가 안전해질 것이다.

이게 바로 디테일의 힘이다. 인간은 거대 집단을 추상적으로 스케치하는 통계 수치보다 개인의 구체적인 일화에 더 쉽게 마음을 뺏긴다. 백 년 전 스페인 독감이 그 당시 전 세계 인구 1%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정보는 잘 실감나지 않지만, 인도에서 한 미혼모가 코로나바이러스로 목숨을 잃고 아이 홀로 남겨졌다는 뉴스에는 마음이 너무 아프다. 이런 온도차는 우리 뇌가 가진 상상력의 한계이자 공감 능력의 한계일 테다. 하지만 이런 좁은 마음과 협소한 공감력을 역이용할 수도 있다. 작고 오래된 커뮤니티가 바이러스를 포위하면 바이러스의 익명성이 제거된다. 그러면 바이러스와의 전투에서 몇 가지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첫 번째 장점은 공공의 정보력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고급스러운 테크놀로지로 개개인의 동선을 추적하지 않아도 비교적 손쉽게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우리의 ‘페르난도’가 평소에 어디를 싸돌아다니는지, 누구를 만나고 다니는지 같은 블록에 사는 사람들은 대충 다 알기 때문이다. 첨언을 하자면, 이것은 자기들의 실수를 인정하기 싫은 유럽 언론과 ‘국뽕’에 취한 한국 언론 사이에서 최근 벌어지는 ‘국가 안전 VS 개인 프라이버시 존중’이라는 신경전과 아무 상관이 없다. 쿠바에는 원래 사생활 개념이 거의 희박하다. 신상 정보의 공유는 커뮤니티 안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현상이다.

두 번째 효과는 공포에 기반한 혐오를 막아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의 얼굴을 모를 때 더 쉽게 원색적인 비난을 던진다. 얼굴을 본다면 차마 꺼낼 용기도 없을 말들을 내뱉으며 구업을 쌓는다. 굳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관계라는 이유도 있지만, 공포심은 상대방의 정체를 모를 때 더욱 강화되기 때문에 또 그렇다. 이는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서 이름 모를 확진자를 향해 쏟아지는 집단적인 감정에서 잘 드러난다. 힐난, 분통, 공포가 역동적으로 뒤섞여 있다.

그러나 만약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이 내가 숟가락 숫자까지 아는 이웃이라면 어떻게 할까? 그 사람이 어쩌다가 전염병에 걸리게 되었는지 사정까지 눈앞에 훤하다면? 감정에도 자연스럽게 제동이 걸린다. 상대방에 대한 화보다는 걱정이 먼저 앞서고, 화가 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깔린다. (물론 채신머리없이 파티를 찾아다니는 무책임한 젊은이가 커뮤니티로 바이러스를 유입했다면 그때의 분노는 익명을 향한 분노보다 곱절로 강해질 것이다.) 바이러스가 무서운 것은 매한가지지만, 그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얼굴 보고 살 사람과의 관계를 아작낼 수는 없다. 이렇게 작은 커뮤니티에 살면 혐오와 공포로 쓸데없이 마음을 불태우지 않아도 된다. 마음의 평정을 찾기가 좋다.

세 번째 효과는 커뮤니티가 사람들의 건강을 ‘블록 단위’로 묶어준다는 것이다. 같은 커뮤니티에 속한 사람들은 서로 접촉이 끊이질 않는다. ‘사회적 거리 1m’라는 지침은 이 필드 안에서 완전히 무색해져 버린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 커뮤니티 밖으로 잘 움직이지 않는다. 일상의 관계가 충족되므로 멀리 나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런 배치 속에서는 전염병이 돌더라도 확산이 자동적으로 차단된다. 바이러스가 진입한 커뮤니티 내부에서는 난리가 나겠지만, 위기는 그 이상으로 확산되지 않고 딱 그 블록 안에서만 끝난다.

지난달에는 내가 있는 꼰술또리오 바로 옆 블록에서 확진자가 동시에 아홉 명이 나온 적이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기들끼리 모여서 파티를 했다고 한다. 그날 전국적으로 스물 한 명의 확진자 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 숫자는 더 충격적이었다. 나는 앞으로 여기저기서 출몰할 환자들을 마주할 생각에 어지러웠다. 그런데 그 주가 다 갈 때까지 확진자가 딱 3명만 추가되었다. 사태는 그대로 종료되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이 시국에 파티를 할 만큼 개념 없는 사람들도 웬만해서는 자기 구역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 외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전략들은 한국에서 그대로 쓰일 수 없다. 사회의 배치 자체가 다른데 대응책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쿠바의 이야기에서 한 가지를 배울 수는 있다. 테크놀로지를 동반하는 고도의 관리 전략만이 코로나 정국을 헤쳐 나가는 정답이 아니며, 테크놀로지가 고도로 발달하지 않은 곳에서도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이러스는 살아있는 세포 없이 생존할 수 없다. 그래서 바이러스는 반드시 사람을 닮고, 사람이 사는 사회를 닮는다. 이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방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쿠바의 주민들은 의대생들이 매일 뻬스끼사에 나서줘서 고맙다고 말하지만, 나는 오히려 ‘쿠바의 신비한 뻬스끼사’가 효율은 낮아도 늘 효과를 괜찮게 보는 이유가 바로 동네 커뮤니티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의식 있는 커뮤니티야말로 일차적인 방어선이자 첫 번째 필터다.

역시 거리 두기에 정답은 없다. 코로나바이러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며 멀찌감치 뒷걸음질 칠 때조차, 스텝을 밟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서로의 스텝을 조금씩 베끼고 훔치면서 최선의 안무를 짜는 수밖에.

아침 꽁트, <사회적 거리 0m>

커뮤니티 내부에서 사회적 거리는 0m로 설정된다. 이제는 이런 접촉의 장단점을 잘 알지만, 주민들이 과도하게 이웃의 정을 나누는 것을 볼 때마다 여전히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다. 예를 들면, 내가 한 집을 노크하면 바로 옆 집 주민도 미리 문을 열어둘 때가 많다. 그러면 나는 두 주민에게 동시에 뻬스끼사 질의응답을 실시한다. 그런데 뻬스끼사 끝나도 이 두 사람은 집에 안 들어간다. 대신 서로 딱 붙어서 수군수군 이야기를 해댄다. 어머, 코로나바이러스 정말 무섭다. 어제는 또 아바나 비에하에 확진자가 그렇게 많이 나왔다며? 그런데 그 사람들은 요즘 닭고기 어디서 살까? 이 동네는 닭고기가 동 났는데… 그러다가 아예 상대의 집에 들어가서 커피까지 한 잔 얻어 마신다. 나는 할 말을 잃는다. 아니, 코로나바이러스 무섭다며…… 무서운데 왜 그렇게 서로 딱 붙어 있는 거야…….

그 후로 나는 주민들의 일상을 아침마다 감상하는 꽁트로 여기기로 했다. 꽁트에서 가장 튀는 인물들은 대개 문제가 있는 주민들이다. 내 구역에서는 마구 할머니와 하비엘을 꼽을 수 있다. 마구 할머니는 환기도 잘 안 되는 집에 고양이와 강아지를 데리고 홀로 사신다. 이 할머니의 취미는 의사, 의대생, 혹은 간호사만 보면 자기가 어떻게 아픈지 하소연을 늘어놓는 것이다. 이번에 뻬스끼사 때도 똑같은 하소연을 시전했는데, 이미 우리가 할머니의 전략을 눈치 챘다는 것을 깨닫자 이제는 문을 아예 안 열어주고 집 안에 숨어버렸다. 하비엘은 마구 할머니의 옆집에 산다. 서류상 기록된 나이는 40대인데 하는 행동은 길거리 청년 남자애들과 비슷하다. 오지랖도 넓고 동선도 넓고, 하는 말의 9할이 농담 따먹기다. 요즘은 나만 보면 한국에 데려가 달라고 조르는 취미가 생겼다. 만약 이 블록에 바이러스가 유입된다면 하비엘이 가장 유력한 후보다.

그런데 이렇게 성격이 극과 극인 둘이 또 단짝이다. 마구 할머니는 우리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대답하지 않지만, 하비엘이 끼어들면 곧바로 신경질을 내면서 목청껏 대답한다. 또, 하비엘 역시 외로운 꼬부랑 할머니에게 나름 마음을 쓰고 있는 모양이다. 지난번에는 할머니 생신날에는 맥주를 사다가 같이 축하했다고 한다. 합의된 파티라기보다는 하비엘이 할머니를 일방적으로 밖으로 끌어내서 귀찮게 했을 가능성이 더 크긴 하지만. 이 심난한 코로나 시기에 신경질 내는 할머니와 철없는 중년이 서로 술잔을 기울이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웃기다. 그 후로 우리는 할머니의 건강 상태는 하비엘을 통해 모니터한다. 마구 할머니 본인의 말보다 더 신뢰가 간다.

우리 집 옆집 아줌마도 한 동안 내 관찰 대상자였다. 직접 뻬스끼사를 하지는 않지만, 오후에 테라스에서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아줌마가 길 건너 앞집으로 놀러가는 모습을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보게 되었다. 어휴, 저 아줌마 또 저기 가네. 아예 앞집에 가서 살지 그러나?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혀를 찼다. 그런데 어느 날 옆집 아줌마를 길거리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아줌마는 혹시 이 코로나 시기에 무슨 일이 있으면 자기에게 부탁하라고 따뜻한 말을 건넸다. 고마운 마음에 나도 의대생이라는 내 신분을 밝히고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줌마는 빙긋 웃으면서 자기는 의사니까 괜찮다고 말했다. 의사라니, 의사란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입이 떡 벌어졌다. 매일 이웃을 방문하며 감염 리스크를 올리고 있는 사람이 예방 수칙을 잘 알고 있는 의사니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거꾸로 심난해해야 할까? 모르겠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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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라리사도 사회적 거리 0m를 유지하며 사는 주민들이다. 우리는 같은 집에 살기 때문이다. 라리사는 의료 보험을 구매하지 않았기 때문에 뻬스끼사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내가 뻬스끼사를 나가고 있는 이상 라리사 역시 감염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고, 또 감수하고 있다. 그런 점이 고맙다. 라리사는 내가 뻬스끼사에 나가겠다고 했을 때 한 마디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조심하라는 말과 손을 잘 씻으라는 당부만 했을 뿐이다. 맨 처음에는 친구의 안전을 위해서 집 안에서 1m의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볼까 했는데 금세 포기했다. 같이 사는 사이에서는 역시 잘 안 된다. 물리적 거리는 물론이요, 심리적 거리가 가까운 탓이다. 우리 둘 다 서로를 운명공동체로 여기고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두 달이 넘는 격리 기간 동안 우리는 평소에 안 하던 짓들을 하고 있다. 디저트 만들기, 안 해본 요리에 도전하기, 필터 없이 커피 내리는 법 연구하기, 테라스로 떨어진 아기 새 돌봐주기…… 그리고 서로의 기행에 증인이 되어주고 있다. 종종 영화 취향도 섞는다. 라리사가 틀어준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 나는 십 년 만에 다시 퀸의 음악을 듣기 시작했고, 내가 튼 <마이 블루베리 나잇>을 감상한 후 라리사는 왕가위 감독의 존재감을 알게 되었다. 또, 얼굴 맞대고 수다 떨 사람이 서로 밖에 없으니 별별 이야기를 다하게 된다.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하는 주제는 음식이다. 라리사는 고국 브라질의 음식을 묘사하는데 열과 성을 다하는데, 이게 아주 달콤한 고문이다.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면 언젠가 반드시 브라질에 가겠노라고 매일 저녁 식탁에서 맹세하고 있다. 가서 3kg는 찔 정도로 먹고 올 생각이다. 내 사주팔자에서 빌빌거리는 식상이 이렇게까지 불타오를 수 있다고 상상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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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 푸....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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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에 떨어진 아기새

알려면 움직이는 수밖에 없고, 살려면 여기 사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전반적인 나의 뻬스끼사 이야기다. 코로나 시기에 고립된 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특한 이야기 한 조각이다.

쿠바 정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뻬스끼사에 나서는 의대생들을 영웅으로 치켜세우고, 이들이 진정한 의사가 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방송한다. 나는 이런 서사에서 멀리 비껴있고 싶다. 의대생들의 사기를 북돋아야 하는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나는 영웅주의에 어울릴 만한 영웅이 아니다. 이래저래 생각이 많았어도 뻬스끼사를 시작한 이유는 하나였다.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정체불명의 것이 닥쳤다. 이게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알려면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고,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게 뻬스끼사밖에 없었다. 이런 마음가짐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 중한 결정을 내리는 영웅보다는, 당연한 사실들을 징검다리 삼아서 갈 길을 더듬는 소시민에 가깝다.

이는 까뮈 역시 <페스트>에서 서술한 바가 있다. 그는 오랑 시에서 자발적인 보건대가 조직된 것을 대단한 영웅들의 희생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단지, 현실 도피의 시기를 끝내고 페스트가 정말로 이 도시에 닥쳤다는 것을 인정한 시민들이 생겼을 뿐이라는 것이다. 재난을 인정하는 순간 행동할 수밖에 없다. 피할 수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어차피 어디를 가든지 전염병에 둘러싸이게 된다면 답은 하나뿐 아니겠는가. 원래 살아있는 것들은 움직임을 멈출 수 없다. 도망치든지 돌파하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

보건대에 헌신한 사람들도 그렇게 대단한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은 아니다그들은 해야 할 일이 그것뿐임을 알고 있었으며그런 결단을 내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때 처지로는 오히려 믿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 문제는 둘에 둘을 보태면 과연 넷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아는 것이다그 당시 자기네 생명을 걸고 있었던 사람들 또한 결정해야 한 것은그들이 과연 페스트 속에 있느냐 아니냐페스트와 싸워야 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까뮈, <페스트>)

내가 뻬스끼사를 하면서 배우는 것은 의사로서의 소명보다는 좀 더 평범한 것들이다. 이를 테면 앎이 몸에 달라붙을 때의 느낌 같은 것이다. 당연한 것을 아는 게 사실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 때 찾아오는 서늘한 기분 같은 것이다. 배고픔을 알려면 배고파야 한다. 아픔을 알려면 아파봐야 한다. 무슨 일이 생기든 삶이 계속된다는 사실이 꼭 희망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면 삶이 실제로 멈춰 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쿠바의 소박한 주민들이 코로나바이러스를 이길 수 있는지 아닌지는 뻬스끼사를 해봐야 안다. “문제는 둘에 둘을 보태면 과연 넷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아는 것이다.” 알려면 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에게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면, 이곳에 있을 이유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런 심난한 시기에 중심을 잡으려면 지금 내가 발 붙이고 있는 ‘여기’에서 사는 수밖에 없다. 가족도 없고 학업도 멈춘 쿠바에서 내가 새로운 이유로 찾은 것이 바로 뻬스끼사 주민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내가 코로나 시기를 버틸 수 있는 이유와 힘을 주는 사람들이다. 거꾸로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가만히 있어도 길을 잃는 시대이니, 이렇게 어찌저찌 함께 살고 있는 지금이 억울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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