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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으로 보는 세상 이야기]유식불교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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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0-06-22 11:36 조회1,5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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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불교를 만나다



장현숙(감이당 금요대중지성)

세상 속 낯선 부처

10여 년 전 지인의 권유로 처음 불교경전이란 것을 만났다. ‘읽었다’라고 하지 않고 ‘만났다’라고 표현한 것은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자로 된 책이었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사경을 했다. 사경은 경전을 필사하는 것이다. 작은 붓을 가지고 처음 보는 『금강경』의 글자를 한자 한자 베껴 썼다. 사경하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부처님이 역사적으로 살아있었던 분이라는 것이었다. 부처님을 금박으로 입혀진 동상과 경전 속 인물로만 만났으니 이 놀라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금강경』 첫 장면 속에 있는 부처님은 식사 때가 되면 밥을 빌어 식사를 하고, 발을 씻고, 결가부좌를 하는 부처님이었다. 무량지겁이 어쩌니 하는 시간 속, 도리천이니 도솔천 어쩌고 하는 공간에 살고 있는 신화적 존재라고 생각한 부처님이 우리가 사는 시공간과 같은 모습의 시공간에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사셨다니. 참 낯설었다. 세상 속 낯선 부처.

그런 밥을 먹고 발을 씻고 가부좌를 튼 다음에 부처님이 하는 것은 제자들과 강학하는 것이었다. 『금강경』 구절구절마다 ‘수보리, 어의운하’라는 말이 반복되는데, 이는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뜻이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질문하면, 수보리는 그 질문에 답을 한다. 물론 때로는 수보리가 묻고, 부처님이 답하기도 한다. 가끔 수보리가 하는 대답이 마음에 들면, 착하구나, 착하구나 하며 크게 칭찬을 한다. 필사를 하며, 부처님과 수보리가 주고받는 얘기는 무슨 외계의 일이라도 되는 모양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질문을 통해 제자를 끌어주려는 스승의 마음과 최선을 다해 자신이 생각한 바를 얘기하는 제자의 모습이 참 보기 좋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주 잠시, 질문 많은 스승 밑에서 수보리는 참 힘들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첫 사경은 신화 속 금박 입혀진 부처님을 내가 사는 익숙한 세상 속으로 급 소환하고, 질문 많은 스승 밑의 수보리를 연민하며 끝냈다.

그렇게 첫 사경을 끝내고, 처음부터 다시 사경을 시작했다. 두 번째라서 그런지 이젠 내용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용 중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시명(是名)’이라는 말이었다. ‘시명’은 ‘그 이름’이란 뜻이다. 부처님은 “부처는 부처가 아니라, 그 이름이 부처다” 또는 “많은 것은 많은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많다’ 이다” 등의 말씀에서 ‘시명’이란 말을 반복해서 사용했다. ‘그 이름’이라니? 부처는 그냥 부처인 것이지 ‘그 이름’이 부처라니? 많은 것은 그냥 많은 것이지 ‘그 이름’이 많은 것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두 이름으로 되어 있다고 말하는 듯했지만,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사경을 권했던 분에게 『금강경』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분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대답했다. 뭔 보리? 한글로는 ‘위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란다. 하지만 그것도 뭔 말인지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렇지만 ‘시명’이 그 아뇩 어쩌고 하는 깨달음의 키워드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부처님은 왜 그렇게 많이 ‘시명’을 얘기했겠는가.

그날 이후 매일매일 ‘시명’에 대한 생각했던 것 같다. 보이는 모든 것에 그리고 들리는 모든 것에 ‘시명’을 적용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세상은 정말 수많은 이름들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았다. 아니 세상은 이름 그 자체였다. 남편은 남편이 아니라 ‘그 이름’이 남편이었던 것이다. 아들은 아들이 아니라 ‘그 이름’이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 놀라움이라니.

유식(唯識)을 만나다

재작년 다시 불교경전을 만났다. 이번에는 유식(唯識)이었다. 유식은 인도에서 생긴 불교의 한 학파이다. 세상은 오로지(唯) 식(識)으로만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유식’이다. 유식의 핵심 내용을 30개의 게송으로 정리한 『유식30송』을 공부하면서 다시 ‘시명’을 만났다. 유식(唯識)에서는 ‘시명’이 아니라 ‘명언종자(名言種子)’라고 했다. 명언종자는 ‘관념(생각)과 언어의 씨앗’이라는 뜻이다. 유식은 우리 의식의 심층엔 ‘아뢰야식’이라는 근본식(根本識)이 있는데, 거기에 명언종자나 업종자(행위의 씨앗)가 저장되어 있다가, 수많은 인연의 결합에 의해 이 종자들이 전변(轉變)하면서 ‘나의 몸’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심층의식의 종자가 펼쳐낸 환영과 같은 것이라는 것. 종자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세상을 만들어내고, 이름은 그 현실의 모든 것에 붙여진다. 이렇게 붙여진 이름은 다시 심층의식 깊은 곳에 명언종자의 형태로 저장되고, 이 저장된 것은 또 인연의 결합에 의해 현실로 현현된다. 그렇게 이름은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심층의식에서까지 작용하며 내 삶과 세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 이것이 유식이 말하는 세상의 실체였다.

수많은 인연의 결합에 의해 이 종자들이 전변(轉變)하면서 ‘나의 몸’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일체는 마음이 만든 것이라는 것. 물론 그냥 하는 소리려니 했다. 마음을 편하게 먹어야 삶도 편해진다는 정도의 말. 설마 실제로 마음이 저 산과 강, 나무, 사람을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데 유식은 우리의 심층의식이 이 모든 것을 현현해 내었다고 한다. 저 산도, 강도, 나무도, 사람도… 그리고 심층의식이 이렇게 세상을 현현할 수 있는 것은 그 속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 때문이라고 한다. 그 종자 중 하나가 명언이다. 생각과 언어. 그러니 유식에 따르면, 일체유심조가 아니라 일체유식조(一切唯識造)인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이름으로 붙여진 세상을 말했다. 큰 것은 ‘크다’라는 생각이 작동해서 큰 것일 뿐이지 그 자체로 큰 것은 없다는 것. 그런데 유식은 한 발 더 나아가 세상 자체가 명언(생각과 언어)종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즉 만들어진 세상에 생각과 언어가 붙여졌을 뿐 아니라, 생각과 언어 그 자체가 시시각각 현재의 세상을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세상이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세상이야기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한다. 불(佛)은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그러니 불교는 부처님이 깨달은 바를 전하는 것이다. 오래전 보리수나무 아래서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신 것은 무엇일까? 그 마음이 여러 경전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모든 경전은 부처님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초기경전을 읽어보면 부처님은 늘 고통(苦)을 얘기한다. 그리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얘기하고, 그 길이 있음을 얘기한다. 사는 것이 고통으로 얼룩져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인가 보다. 그러니, 모든 불교경전이 전하고자하는 핵심은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유식은 그 길을 식(識)에서 찾는다.

남편은 남편이 아니라 ‘그 이름’이 남편일 뿐이다는 깨달음을 얻었을 때, 나는 남편과 관련된 수많은 번뇌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들은 아들이 아니라 ‘그 이름’이 아들일 뿐이다는 깨달음은 또 어떠했는가. 이름은 대상을 지칭하는 것일 뿐이라 생각했지만, 깨닫고 보니 이름은 욕망 그 자체였다. 그러니 이름의 실상을 아는 것은 내 욕망에 대한 깨달음이기도 하다. 유식은 그러한 깨달음에 더해, 이름이 지칭하는 것을 실체인 냥 붙잡고 놓지 않게 하는 식(識)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리고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기 위해서는 식 자체를 전이(轉移)시켜야 한다고 얘기한다.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길로서의 식의 전이. 그게 뭘까? 그리고 어떻게 가능할까? 유식은 그 길을 이론적으로도 그리고 실천적으로도 보여준다.

이름의 실상을 아는 것은 내 욕망에 대한 깨달음이기도 하다.

하여, 앞으로 연재되는 ‘유식으로 보는 세상이야기’는 그 길에 대한 나의 탐구 과정이다. 부처님은 그 길을 깨달았고, 경전은 그 길을 전했으니, 우리는 그 길을 찾아 간다. 오랜 시간동안 전해지며 수많은 사람들이 밟았을 그 길에 대한 탐구를 이제 글로 시작하려 한다. ‘시명’과 ‘명언종자’로 촉발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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