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공이란 말처럼 파격적인 말은 없다. ‘텅 빈’, ‘공허한’이란 뜻이다. 인도에서 ‘0’이라는 숫자가 만들어진 것은 바로 이 ‘공’이란 말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공은 비었다는 뜻이다. 무엇이 비었는가? 행위의 주체가 비었다는 것이다. 행위의 주체가 비었음은 초기불교(부파불교 이전, 즉 근본 분열까지의 불교를 ‘초기불교’라 한다)의 핵심 내용이기도 하다. 초기불교에서는 이를 연기(緣起)로 설명했다. 이것은 이것 자체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에 연(緣)하여 생겨(起)나는 것이다. 그리고 저것은 또 저것 자체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연(緣)하여 생겨(起)난다. 생겨나는 것이든 사라지는 것이든 그 자체에 의해 생하고 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연하여 생멸한다. 이는 다른 것과 연(緣)하지 않고 그 자체로만 존재할 수 있는 주체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어쨌든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이 ‘공(空)’을 이야기하는 각종 대승경전들이 편찬되기 시작하자, 대승의 입장에선 ‘공’에 대한 이론적 체계를 마련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부처님이 깨달았다는 ‘공’은 무엇이며, 그것의 이론적 근거는 무엇인가? 이때 ‘공’의 철학적 근거를 마련한 사람이 ‘용수’(나가르주나, 150년~250년)이다. 용수는 『중론』을 통해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인 ‘공’을 이론적으로 이해시키고, 부파불교를 비판한다. 왜? 세계는 무엇이며, 자아는 또 무엇인가는 불교의 핵심 질문이다. 이에 대해, 초기불교에서는 ‘세계는 경험된 것이며, 자아는 그 같은 경험을 통해 드러나는 가설적(假設的) 존재’라고 했다. 세계도 자아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연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그런데 부파불교에서는 자아는 가설적 존재이지만 그 자아가 경험하는 온갖 원인과 조건들은 ‘실재하는 것’(有)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한마디로 세계를 구성하는 구성 성분들(法)에는 자성(自性)이 있다는 것. 즉 ‘아(我)는 공하지만 법(法)은 공하지 않다(有)’가 부파불교가 주장하는 바였다. 이에 용수는 아(我)는 물론 법(法)도 모두 고유한 본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모든 것은 인간의 언어가 분별하여 개념적으로 지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 것. 즉 일체의 모든 것이 공임을 천명했다. 아도 공하고 법도 공(我空法空)하다. 이것이 우리가 익히 들어온 공사상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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