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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으로 보는 세상이야기]유식(唯識)사상이 나오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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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0-07-11 19:58 조회1,1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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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唯識)사상이 나오기까지



장현숙(감이당 금요대중지성)

‘의식’ 또는 ‘무의식’이란 말은 주로 인간 정신이나 심리를 표현할 때 많이 사용된다. “그때는 아무래도 의식을 잃은 것 같아”라든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행동 했어”와 같이 의식이 어쩌니 무의식이 어쩌니 자주 얘기하지만, 막상 ‘식’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생활 속에서 많이 사용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생각해본 적 없는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가 ‘식’이다.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은 서양심리학에서 주로 다루는 주제로 알고 있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무의식을 발견했다는 얘기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서양심리학에서나 다룰법한 식을 불교에서 듣게 되다니. 불교를 잘 모르는 입장에선 참 뜬금없이 느껴졌다. 그런데 유식을 공부해보면, 불교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식에 대해 탐구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아주 깊고 세밀하게.

유식은 ‘오로지 식’이라는 뜻으로 핵심내용이 모두 식에 대한 것이다. 식이 무엇인지, 어떻게 작용하는지, 식과 세상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등등. 그리고 그 핵심을 30개의 게송으로 정리하여 편찬한 것이 『유식30송』이다. 『유식30송』은 인도의 불교학자인 ‘세친’의 저서인데, 세친은 서기 400년~480년경 인도 북서에 있던 간다라국의 푸루사푸르에 살았던 사람이다. 서기 400년대에 이미 식의 핵심 사상이 총 정리된 책이 나왔으니, 유식사상이 처음 태동한 것은 그것보다는 훨씬 빠른 시기였을 것이다. 프로이트를 시작으로 서양에서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탐구한 역사는 약 15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불교에서 인간 의식을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최소 1,600년이나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불교는 ‘공(空)’ 사상이라고 알고 있다. 불교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일체는 모두 공(一切皆空)’이라는 말을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한 학파인 유식은 ‘일체개공’이라는 말은 하지 않고, ‘경계(境)는 없고 오로지 식만 있다’는 뜻인 ‘유식무경(唯識無境)’을 이야기한다. 왜 그럴까? 이것을 알려면 유식사상이 나오기까지 인도의 불교 상황을 좀 알아야 한다.

대승(大乘)불교의 탄생

모든 이야기는 부처님 열반 후부터 시작된다. 어떤 단체든 스승이 돌아가시고 나면 수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살아계실 때는 직접 물어보며 문제를 해결하지만 돌아가시고 나면 더 이상 물을 데가 없다. 그래서 스승의 부재는 제자들의 생각이 각양각색으로 드러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불교도 그러한 과정을 겪는다. 부처님 열반 후 100년 무렵 불교는 근본적인 분열을 겪게 된다. 분열은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에 대해서 라기 보다는 계율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에 생겼다고 한다. 먹을 것을 다음날 까지 비축하면 안 되지만 썩지 않는 소금은 소지해도 되는지, 정오까지만 식사할 수 있다지만 그것보다 약간 더 오후는 식사해도 되는지, 탁발을 이미 했는데 오전중이라면 또 다른 마을에 가서 다시 탁발해도 되는지 등등.. 100년이라는 시간은 강산이 10번 변할 정도로 긴 시간이다. 사람도 변하고 환경도 변한다. 그러니 100년 전엔 통하던 계율이 더 이상 지켜지기 어렵게 되기도 한다. 분열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이 분열로 인해 크게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누어졌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무렵, 인도는 마우리야 왕조의 아쇼카왕이 최초로 통일제국을 세우게 된다. 불교의 전파에 있어서 아쇼카왕의 역할은 매우 크다. 아쇼카왕은 통일제국을 세운 후, 제국의 통치권을 확립하고 왕의 권력을 제약하고 있는 브라만 세력을 극복하기 위해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그러면서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불교를 인도 전역에 전파하고 사찰에는 많은 토지를 하사하게 된다. 그런데 이 문화정책이 대승불교가 생겨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하사받은 토지로 사찰이 부유해지자 승려들은 경제적으로 윤택해진 사찰에 머물며 더 이상 걸식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걸식을 멈추었다는 것은 단순히 승려들이 사찰에서 끼니를 해결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승려는 걸식을 통해 대중의 삶을 이해하고, 대중은 걸식을 통해 승려들에게 법을 구할 수 있었는데, 그 소통 통로가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부유해진 승려들은 사찰에 머물며 부처님이 남긴 가르침에 대한 각종 이론을 만들며 논쟁을 일삼게 된다. 이 과정에서 상좌부와 대중부로 근본 분열되어 있던 불교는 교법 상의 해석을 둘러싸고 또 분열에 분열을 거듭한다. 그리고 부처님열반 4백 년 무렵에는 20여 부파로 분열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 불교를 ‘부파불교’ 또는 ‘아비달마불교’라 한다.)

승려는 걸식을 통해 대중의 삶을 이해하고, 대중은 걸식을 통해 승려들에게 법을 구할 수 있었는데, 그 소통 통로가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대중을 구제해야할 승려들이 ‘아라한’이라는 개인적 열반만을 추구하거나 교법 상의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에만 빠져있자 대중은 대중 나름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하기 위한 다른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한편 부처님 열반 시 사리(부처님 유골)를 분배하거나 불탑(사리를 봉안한 무덤)을 조성하는 것은 모두 재가신자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불탑을 조성하는데 관계한 사람들 중에 ‘바나카’ 즉 독송자(讀訟者)라고 하는 지도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불탑에 의지하여 생활하며 오로지 부처님을 생각하고 예배하는 과정에서 시공을 초월한 진리의 법신으로서 부처님을 만나는 체험(觀佛三昧)을 한다. 그리고 탑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보살행을 찬탄하거나 부처의 위대함을 이야기로 만들어 들려주게 된다. 초기경전에 나오는 중생을 진리로 인도하는 인간적인 모습의 스승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생을 거치면서 초인적인 능력과 수행을 해온 대승경전 속 부처의 모습은 이 시기에 탄생한 것이다. 이들은 승려도 아니고 재가신도도 아닌 승(僧)도 속(俗)도 아닌 제3의 성격의 집단을 형성하였는데, 이 집단이 대중을 외면하며 부처님의 법을 독식하는 승려들에 대응하여 새로운 불교 운동을 주도한다. (『인도철학과 불교』 참고, 권오민 지음)

그들은 자신들의 독자적 사상을 나타내기 위해 새로운 경전들을 편찬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도를 대승(大乘)이라고 하고, 기존의 부파불교의 여러 부파들은 소승(小乘)이라 폄하하여 칭하게 된다. 자기들을 대승이라 하니 나머지는 당연히 소승이 되어 버리는 것. 부파불교 입장에선 마른하늘에서 날벼락 맞은 것처럼 가만히 있다가 졸지에 작은(소승)불교가 되어 버렸다.

부파불교의 ‘유(有)’, 용수의 ‘공(空)’

“대승은 남녀노소, 배운 자, 못 배운 자 할 것 없이 모두를 피안으로 인도하는 커다란 수레라는 뜻이다.”(『인도철학과 불교』, 권오민 지음, p241) 대표적인 대승경전 중 하나인 『반야바라밀다심경』의 가장 마지막 구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는 대승불교가 추구하는 바를 가장 잘 보여준다. 이는 ‘가자, 가자, 저 피안의 세계로 가자. 모두 함께 저 피안의 세계로 가자. 오! 깨달음이여’라는 뜻이다. 소승(小乘)은 작은 수레란 뜻으로 오로지 개인의 깨달음과 해탈에 초점을 맞추고 수행한다. 누가 누구를 구제한다거나 함께 해탈한다는 개념은 없는 것. 깨달음은 철저히 개인의 몫이다. 이에 비해 대승(大乘)은 ‘큰 수레’란 뜻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일체중생이 한 몸이 되어 더불어 깨닫고 성불하는데 뜻을 둔다. 그리고 소승은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보다 한 단계 낮은 ‘아라한’이라는 성자를 목표로 수행하는데 반해, 대승은 부처 자체, 즉 깨달은 자가 되는 것에 뜻을 둔다. 그러다보니 대승의 입장에선 부처님이 깨달은 것, 깨달음 즉 불(佛) 자체가 무엇인지가 중요하게 된다. 새벽녘 보리수 나무아래에서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대승불교는 그 깨달은 바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에 이르는데, 그것이 바로 ‘공(空)’이다.

생각해보면 공이란 말처럼 파격적인 말은 없다. ‘텅 빈’, ‘공허한’이란 뜻이다. 인도에서 ‘0’이라는 숫자가 만들어진 것은 바로 이 ‘공’이란 말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공은 비었다는 뜻이다. 무엇이 비었는가? 행위의 주체가 비었다는 것이다. 행위의 주체가 비었음은 초기불교(부파불교 이전, 즉 근본 분열까지의 불교를 ‘초기불교’라 한다)의 핵심 내용이기도 하다. 초기불교에서는 이를 연기(緣起)로 설명했다. 이것은 이것 자체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에 연(緣)하여 생겨(起)나는 것이다. 그리고 저것은 또 저것 자체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연(緣)하여 생겨(起)난다. 생겨나는 것이든 사라지는 것이든 그 자체에 의해 생하고 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연하여 생멸한다. 이는 다른 것과 연(緣)하지 않고 그 자체로만 존재할 수 있는 주체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어쨌든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이 ‘공(空)’을 이야기하는 각종 대승경전들이 편찬되기 시작하자, 대승의 입장에선 ‘공’에 대한 이론적 체계를 마련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부처님이 깨달았다는 ‘공’은 무엇이며, 그것의 이론적 근거는 무엇인가? 이때 ‘공’의 철학적 근거를 마련한 사람이 ‘용수’(나가르주나, 150년~250년)이다. 용수는 『중론』을 통해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인 ‘공’을 이론적으로 이해시키고, 부파불교를 비판한다. 왜? 세계는 무엇이며, 자아는 또 무엇인가는 불교의 핵심 질문이다. 이에 대해, 초기불교에서는 ‘세계는 경험된 것이며, 자아는 그 같은 경험을 통해 드러나는 가설적(假設的) 존재’라고 했다. 세계도 자아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연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그런데 부파불교에서는 자아는 가설적 존재이지만 그 자아가 경험하는 온갖 원인과 조건들은 ‘실재하는 것’(有)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한마디로 세계를 구성하는 구성 성분들(法)에는 자성(自性)이 있다는 것. 즉 ‘아(我)는 공하지만 법(法)은 공하지 않다(有)’가 부파불교가 주장하는 바였다. 이에 용수는 아(我)는 물론 법(法)도 모두 고유한 본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모든 것은 인간의 언어가 분별하여 개념적으로 지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 것. 즉 일체의 모든 것이 공임을 천명했다. 아도 공하고 법도 공(我空法空)하다. 이것이 우리가 익히 들어온 공사상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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