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쥐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바로 그날, 수위의 몸에 페스트 증세가 확연히 드러났다. 오랑의 쥐들이 어지간히 죽고 나자 현장을 잃어버린 페스트균이 사람들로 무대를 옮겨 그 위력을 떨치기 시작한 것이다. 목, 겨드랑이, 사타구니에 멍울이 생겨 나무공이처럼 딱딱했다. 의사가 상태를 묻자, 그는 “종기가 났나 봐요” 아마도 “과로했던 모양이에요”(33쪽) 라며, 자기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죽으면서 내뱉은 마지막 말 “쥐들”이 그걸 말해 준다.
페스트 상황에서 수위가 겪은 이 며칠간의 삶이 그의 인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거꾸로 말해 죽은 쥐를 발견하고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그 며칠간을 길게 늘여놓으면 그대로 그의 생애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늘 일상에서 어떤 습관을 들이며 살아간다. 그것이 꼭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밤이 되면 잠을 자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이런 되풀이되는 습관이 없이는 생명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문제는 그 가운데 불쑥 뛰어드는 예기치 않은 상황이다. 예기치 않은 상황은 습관이 매너리즘으로 전락하지 않고 다시 생기를 띠게 하는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오랜 습관에 달라붙은 찌든 때나 이런저런 병균들을 털어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위에게서 보듯이 어지간한 사건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내게는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는 굳은 ‘신념’이 사건의 진상 파악을 가로막는다. 이 신념은 현실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을 눈으로 목도해도 누군가의 음모거나 무능력, 실수 ‘탓’으로 이어진다. 어떤 경우에도 내 책임은 아니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없고, 그것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된다. 습관을 바꿀 이유도 없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죽음을 맞는다. 이 모든 일은 “망할 놈의 쥐”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 배너를 클릭하시면 MVQ 홈페이지에서 더 많은 글들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