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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으로 보는 세상 이야기]식(識)의 시대를 열다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20-07-27 14:53
조회 : 182  






식(識)의 시대를 열다


장현숙(감이당 금요대중지성)

공(空)에서 식(識)으로

‘공’은 연기(緣起)를 의미한다. 연기는 ‘~을 조건하여 일어남’을 뜻한다. 현상계의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일어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서로는 서로를 의존해서만이 존재할 수 있다. 어떤 것도 다른 것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공을 자성(自性) 없음, 즉 그 자체만으로 고유한 성질을 가진 주체가 없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나’에도 ‘법’(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도 적용되는 개념이다. 나뿐만 아니라 법에도 그것을 이루는 고유한 주체가 없다는 것이 아공법공(我空法空)이다. 고유한 주체가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현상은 순간순간 다른 것과 관계하면서 변화할 수밖에 없어서 그 자체로 고유한 성질을 가진 어떤 것이 파악될 수 없다는 것뿐이다.

그러니, 일체가 공이라는 것은 일체가 고유한 주체 없이 비어있다는 뜻이다. 세계는 무엇이며, 자아는 또 무엇인가?는 불교의 핵심 질문이라고 했다. 이 질문에 공사상은 세계도 비었고 자아도 비었으며, 모든 것은 인간의 언어가 분별하여 개념적으로 지어낸 가설적 존재일 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체가 비었다니? 일체가 비었다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면서도 고유한 주체는 없는 상태는 어떤 것인가? ‘공’이란 말을 처음 접했을 때 누구나 한번쯤은 가졌을 의문이다. 모든 것이 다 공이라는데,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나는 무엇이고 저렇게 생생히 보이고 들리는 저 존재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현상계는 연기적으로만 존재하고 별도의 자성은 없다고 해서 모든 존재가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일시적이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집도 있고 산도 있고, ‘나’라는 것도 있고, 어떤 형상과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우리의 마음도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자성 없음(空)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으니 사람들은 공을 실체화하기 시작했다. 비었음을 ‘없음’으로 실체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체가 비어있다는 아리송한 말보다 ‘없다’가 더 잘 이해되지 않는가. 세상도 없고, 나도 없다. 그러니 붙잡을 것도 놓을 것도 애면글면하면서 아등바등할 것도 없다. 사람들은 모든 것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공성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또 얼마나 공허하겠는가. 공을 ‘이해’하면서 염세(厭世)에 빠지게 된다.

우린 있다. 인연의 이합집산의 산물로 일시적이라지만 분명 있다. 그러므로 ‘일시적이긴 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 즉 주체의 인격과 그가 행한 행위의 유전(업)에 관한 문제가 연구되어야 했다. 유식은 용수의 공사상의 문제(?)를 식(識)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유가사들, 세상을 의심하다

유식은 ‘유가사(瑜伽師)’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유가사는 ‘요가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보통 요가라고 하면 ‘아사나’(요가자세) 위주의 요가를 떠올리지만, 사실 요가는 ‘어떤 대상에 마음을 맨다’는 뜻으로,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 작용을 통제하는 수행의 한 방법이다. 유가사들은 요가 중 깊은 선정체험(마음이 집중상태로 있을 때 나타나는 특이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체험이 식을 탐구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정화스님은 『그냥 좋아하기』에서 좌선 수행 중에 일어났던 개인적인 경험을 얘기하신 적이 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알아차리는 마음 챙김을 하고 있을 때”, “어느 순간 몸의 느낌이 달라져 눈을 떠보았는데, 보이는 것마다 빛나고 있었”(북드라망, 정화지음, p25)다고 한다. 이처럼 “선정에 깊이 들어가면 외계의 인식은 사라지고 마음속만의 경험이 장시간 계속된다.” 이때 눈을 감고 있음에도 대상들을 또렷하게 인식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 경험으로 모든 “인식의 대상은 마음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라는 자각이 생기게 된 것.(『인도불교사상사』 참고)

선정 상태에서 어떤 대상이 명료하게 나타났다가 선정에서 나오면 그 대상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고 상상해보라. 처음에는 집중 상태에서만 발생하는 일시적 특이 현상이라고 치부하지만 경험이 반복되면 이 세상 자체를 의심할 수 있다. 이 세상도 우리의 마음작용에 의해 일시적으로 이렇게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이는 마치 장자의 ‘호접몽’과도 비슷하다. 장자가 꿈에서 나비가 되었는데 하늘하늘 자유롭게 날며 나비의 일생을 살다가 홀연히 깨어보니 여전히 장자 자신이었다. 나비였던 꿈이 너무나 생생한 탓에 장자는 의심한다. 장자가 꿈에 나비로 변한 것인지, 나비가 장자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나비 꿈을 꾸기 전에는 절대 하지 않았을 세상에 대한 의심이다. 유가사들도 선정에서 깨어난 후 이 세상을 달리 보기 시작한다. 어쩌면 이 세상도 특이한 식의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이 아닐까. 이 세상의 그러함은 절대적인 그러함이 아닌 우리의 식에 의한 일시적 그러함이 아닐까하는.

이들은 선정 중 나타나는 영상이 다만 식(識)의 작용에 의한 것처럼,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도 다만 식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사실 모두 심층마음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라는 자각을 하게 된 것이다.

하나의 물(水)과 네 개의 앎

유식에는 ‘일수사견(一水四見)’이란 말이 있다. 하나의 물(水)을 네 가지로 안다는 뜻. 인간은 마시는 물(水)로 알고, 물고기는 사는 집으로 알고, 아귀는 피고름으로 알고, 천상의 천인들은 세계를 장식하는 보배로 안다는 것이다. 일수사견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어릴 적에 날아다니는 벌레를 보며 그들이 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하고 궁금해 했던 것이 떠올랐다. 내게는 이렇게 형형색색으로 보이는 세상이 저들에겐 어떻게 보일까? 저들에겐 마치 사막처럼 황량하게 보이는 건 아닐까. 아니 보이기나 할까. 같은 세상(대상)이라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인다면, 우린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같은 대상이라도 사람에게 물(水)로 보이는 것이 다른 존재에겐 보배로 보이는 것은 왜 일까? 유식은 보는 주체(인간,물고기,아귀,천인)의 식(識)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험하는 모든 것은 식에 의해서만 경험할 수 있다. 이 말은 식이 달라지면 같은 대상이라도 다르게 경험한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에겐 물로 보이고 물로 경험되는 어떤 것이 우리와 다른 식을 가진 존재들에겐 집으로 고름으로 보배로 보이고 경험된다는 것.

유식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인 『해심밀경』에는 “식의 소연(所緣)은 유식의 소현(所現)이”(『인도불교사상사』 참조)라는 말이 있다. 이는 대상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은 오로지 식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란 뜻이다. 유가사들은 유가행(요가) 중 나타나는 인식의 대상을 ‘영상(映像)’이라 한다. ‘마음에서 현현하여 나타나는 상’이라는 뜻이다. 유식은 현실에서 보이는 모든 사물도 사실은 우리의 마음에서 현현하여 비치고 있는 ‘상’에 불과하다고 한다. 또 『해심밀경』에는 ‘아타나식’이란 말이 있는데,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식’을 의미한다. 우리의 표면 의식이 잠자고 있을 때도 계속 활동하면서 호흡, 심장의 활동 등을 유지한다. 일상적 표면 의식에 가려져 있지만 우리의 모든 활동을 주관하는 심층의식이다. 유식에선 이를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칭하며, ‘인격이나 경험의 주체 또는 인식의 주체’로 설정하게 된다.

유식에 의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심층의식인 ‘아뢰야식’에 저장된 경험의 잠재에너지(종자(宗子))가 현현(顯現)하여 ‘영상’처럼 나타난 것이다. ‘아뢰야식’이라는 깊은 의식에 저장되어 있던 잠재에너지가 영상처럼 펼쳐낸 것이 이 세상이라는 것. 그러니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가 무엇이냐에 따라 주체의 식이 달라지고, 주체의 식이 다르면 그들이 보는 세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나의 대상(一水)도 사람에겐 물(水)로, 다른 존재에겐 집으로, 피고름으로, 보배로 보여지는(四見) 것처럼.

심층의식을 체계화하다

유식사상을 체계화한 사람은 미륵, 무착, 세친이다. 그중 미륵은 미륵보살을 말하는지 미륵이란 이름의 사람을 말하는지 모호하게 전해진다. 그러니 유식사상을 처음으로 체계화하기 시작한 사람은 무착이라고 할 수 있다. ‘무착’은 서기 395년~470년 경 북인도의 사람이다. 부파불교의 상좌부 계통에 출가하여 선정을 닦고 공(空)을 체득했다고 한다. 그런데 공을 체득했음에도 여전히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 등의 마음의 동요가 있었다고 한다. 공을 체득했다는 것은 깨달았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마음의 동요가 있으니 그 이유를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 무렵 인도엔 미륵신앙이 유행했는데, 무착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륵보살을 만나고자 했고, 마침내 선정 상태에서 도솔천에 올라 미륵보살을 친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미륵보살로부터 유식의 교리를 듣고 돌아와 그 내용을 대중에게 전하게 되는데, 이것이 유식의 시작이다.

그런데, 무착이 실제로 미륵보살을 만났을까? 그건 알 수 없다. 유식을 막 공부하기 시작했을 땐, 무착이 만난 미륵이란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이라기보다 무착 이전에 유가행파의 논사들을 ‘미륵’이라는 이름으로 통칭하여 부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실제로 도솔천에서 미륵보살을 만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도솔천이란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다. 그 세상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갈 수 있을까? 유식으로 생각해보자면, 식이 달라지면 경험할 수 있는 세상도 달라지니 선정의 집중 상태에서 도솔천이라는 세상과 미륵이라는 보살을 만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무착은 미륵에게 들은 유식의 교리로 『유가사지론』을 짓는데, 『유가사지론』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논서는 요가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인 ‘유가사’들이 현실에서 닦은 마음의 경지를 설명한다.

마음을 ‘심,의,식(心,意,識)’으로 나누어 부르는 것은 초기불교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초기불교에서는 심,의,식 각각의 차이를 뚜렷하게 분석하진 않고, ‘심,의,식’ 전체를 그냥 ‘마음’이라고 부른다. 마음을 세분하여 연구하는 것보다 자기와 세계를 연기적으로 인식하는 실천적 수행이 고(苦)를 해결하는 더 큰 방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착은 공을 체득하고도 마음의 불안이 계속되자 마음을 심층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고 표면의식에 영향을 주는 심층의식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심층의식이 표면의식에 주는 영향과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체계화시켰다. 무착이 겪은 마음의 동요는 해결되었을까?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알면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마음의 갈등들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무착이 체계화한 유식사상은 그 동생인 세친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고, 30개의 게송(『유식30송』)으로 정리된 후,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우리시대 왜 ‘유식’인가?

인도에서의 불교는 유식을 끝으로 중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티벳에 영향을 미쳐 ‘티벳불교’가 탄생하고, 중국으로 가서는 ‘선불교’로 변전한다. 그리고 서양으로 건너가서는 심리학과 만난다. 심리학은 식(識)의 학문이다. 우리의 고통(苦)이 어디서 오는지 마음을 탐구하여 해법을 얻고자 한다. 특히 무의식을 분석하여 현실의 고통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을 찾는다.

불교에서는 연기법, 즉 공을 체득하는 것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가장 바른 길이라고 한다. 하지만, 화려한 물질로 끊임없이 정신을 현혹하는 이 시대에 ‘나도 없고, 대상도 없다’는 공은 어렵고도 모호하다. 오히려 ‘세상에 나타나는 갖가지 영상은 식에 의해서 그러하다’는 말을 이해하는 것이 더 쉬운 세상이 되었다. 각종 3D/4D영화나 홀로그램을 본 경험은 식이 현실을 ‘영상처럼 만들어낸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고, 과학은 파동과 양자의 세계에서 의식이 어떻게 물질세상을 현현해내는지에 대한 연구결과를 끊임없이 알려준다. 또 컴퓨터가 세상을 하나로 연결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각자 다른 세상’이지만 거대하게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세상’과 마주하기도 한다.

앞서 일수사견을 얘기했다. 물(水)은 물로써 절대 변하지 않는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식의 상태로 그것을 보느냐에 따라 물은 수많은 모습을 한다. 물(水)이라는 고정된 물(物)이 없다는 것이다. 그 수많은 모습은 물(水)과 만나는 주체의 식(識)의 상태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경험하는 세상은 나의 식이 반영된 세상이다. 내가 매일매일 접하는 형형색색 다양한 세상은 그 세상마다 다른 식이 반영된 다른 세상이다. 그 각각은 분리되고 작지만 하나이면서 거대한 세상을 이루며 연결되어 있다. 유식은 우리의 식이 심층까지 전의(轉依)되었을 때 이 거대한 하나의 세상과 마주할 수 있다고 한다.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호흡하는 한생명의 세상. 유식은 그 세상과 만나는 법을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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