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는 감각되더라도 나에겐 도무지 감각되지 않는 어떤 것을 ‘있다’라고 할 수 있나?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도 ‘그 자체로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내 눈에는 안보이더라도 꽃은 그 자체의 자성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세상을 의심 없이 살고 있다.
유식은 식 너머에 식과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꽃을 ‘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 인식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아무도 인식할 수 없는 꽃은 있다고 할 수 없다는 것. 참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유식을 이해하기 쉬운 시대를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파동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중학교 과학시간에 처음 파동을 배웠을 때 그 놀라움을 기억한다. 이 세상이 이렇게 보이는 것은 눈이 가시광선이라는 파장만을 감각하기 때문이라는 것. 참 놀라운 얘기였다. 이 말에 의하면 우리 눈이 감각할 수 있는 파장의 영역이 바뀌면 세상은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외선 카메라로 찍은 사람의 모습과 일반 카메라로 찍은 사람의 모습이 어떠했는가. 그러니 한번 상상해보라. 만약 인간의 눈이 가시광선과 전혀 다른 파장대의 대상을 인식하고, 귀가 가청영역과 전혀 다른 파장대의 소리를 듣고, 냄새와 맛뿐만 아니라 감촉할 수 있는 영역조차 지금과는 전혀 다르다면? 그래도 저 꽃은 있을까? 그리고 있다하더라도 저 모양 그대로 있을까?
저 꽃은 내 다섯 감각기관이 저 꽃을 감각할 수 있기 때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식에 의존(연(緣))해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꽃이 저 모양(형상)인 것은 내 다섯 감각기관이 저 형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식에 의존(연(緣))해서 그 형상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세상은 분명 ‘식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그리고 ‘식을 통해서만 그 형상을 갖는다.’ 이 말은 식이 달라지면 세상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보고, 듣고, 냄새만 맡을 수 있는 생명체나 맛만 볼 수 있는 생명체에게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파장만을 감관하는 곤충에겐?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 보이는 세상은 우리가 보는 세상과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