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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으로 보는 세상 이야기]오직 식(識)만 있고 세상(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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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0-08-04 16:38 조회1,9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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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식(識)만 있고 세상(境)은 없다!?




장현숙(감이당 금요대중지성)

유식무경(唯識無境)

유식을 공부할 때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유식(唯識)’이라는 말 자체이다. 유식은 ‘오로지 식만 있다’는 뜻이다. 식‘만’ 있다니. 이는 아무것도 없고 그야말로 식만 있다는, 즉 세상은 없다는 소리처럼 들린다. 세상은 저리도 멀쩡히 존재하고 있는데 오로지 식만 있다니. 유식사상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는 말은 이 혼란을 더 부추긴다. 유식무경은 오로지 식만 있고 경(境)(대상)은 없다는 뜻이다. 아예 대놓고 세상은 없다고 못 박는 듯하다. 이 세상이 식으로만 되어있다면 저기에 보이는 맑은 하늘, 감미로운 노래 소리, 내 코를 스치는 커피 향,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맛있는 음식, 손바닥을 스치는 보드라운 고양이의 털 등등은 다 뭐란 말인가. 식이 만든 환영에 불과하단 말인가. 불교경전에서 이 세상을 꿈(夢)에 환영(幻)에 포말(泡)에 비유하는 구절들을 읽은 적이 있다. 비유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이 말들을 유식은 다 사실이라고 얘기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영화 ‘매트릭스’처럼 실제 세상은 기호나 숫자에 불과하고 우린 그 속에서 현실이라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유식사상은 요가 수행자들(瑜伽師)의 경험을 바탕으로 체계화된 것이라고 했다. 요가의 선정(禪定)체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다 보면 깊은 선정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때 외계(外界)의 인식은 사라지고 마음속만의 경험이 지속되는 상태를 체험한다. 이를 선정체험이라고 하는데, 요가 수행자들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사물(대상)은 마음이 만들어 낸 영상(影像)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너무나 확실하게 ‘실제하고 있다’고 생각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사실은 마음이 만들어 낸 영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된 것. 세상은 실제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만들어낸 영상이라는 것. 그렇다면 세상은 홀로그램처럼 존재한다는 것일까? 꿈처럼 존재한다는 것일까?

그런데 유식무경은 식만 존재하고 대상 그러니까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세상은 요지경이 된다. 아무것도 없이 식만 덩그러니 있는 세상. 식이 홀로 꿈을 꾸며 사는 세상. 유식무경은 식은 있고 대상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무엇은 있고 무엇은 없다는 이야기, 즉 유(有)와 무(無)의 이야기가 아니다. ‘식’과 ‘대상’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일체(一切)’라고 하는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의 식과 상관없이 식 너머에서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식과 관계를 맺으며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인식할 때, 객관적 대상이 있고, 그 대상과 별도로 존재하는 우리의 감각기관이 그것을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장미를 볼 때, 장미라는 꽃이 나의 인식과는 상관없이 따로 있고, 우리의 감각기관이 그것을 장미라고 인식할 뿐이라는. 이때 장미는 나의 인식과는 관계없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 장미의 존재함에 나의 인식은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그런데 유식은 일체(一切)는 식 너머에 식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식 안에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라고 한다. 참 어렵고도 아리송하다. 그러니 단어의 뜻으로가 아니라 실제 경험을 예를 들어 이를 이해할 수밖에.

식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세상

내 앞에 꽃이 있다. 그런데 꽃은 어떻게 있는 것일까? 나는 꽃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 당연히 눈으로 보고, 냄새를 맡고, 촉감으로 만져보고 등등의 오감을 사용해서 꽃이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무엇이 있다’라고 알 때는, 보고(眼), 듣고(耳), 냄새 맡고(鼻), 맛보고(舌), 감촉하는(身) 다섯 감각기관이 인식한 것을 의식(意識)이 종합하여 안다. 그처럼 내 앞에 있는 저 꽃도 그런 인식 과정을 거쳐 나는 꽃이 있음을 안다. 그런데 저 꽃은 내가 다섯 감각기관으로 감각 할 수 없어도 있는 것일까?

 

여기서 헷갈린다. 내가 감각할 수 없어도 친구가 저 꽃을 감각할 수 있기 때문에 저 꽃은 나의 감각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있지 않은가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식은 저 꽃을 내가 ‘있다’라고 하려면 나의 식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식과 상관없이 별도로 존재하는 꽃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

친구에게는 감각되더라도 나에겐 도무지 감각되지 않는 어떤 것을 ‘있다’라고 할 수 있나?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도 ‘그 자체로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내 눈에는 안보이더라도 꽃은 그 자체의 자성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세상을 의심 없이 살고 있다. 

유식은 식 너머에 식과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꽃을 ‘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 인식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아무도 인식할 수 없는 꽃은 있다고 할 수 없다는 것. 참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유식을 이해하기 쉬운 시대를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파동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중학교 과학시간에 처음 파동을 배웠을 때 그 놀라움을 기억한다. 이 세상이 이렇게 보이는 것은 눈이 가시광선이라는 파장만을 감각하기 때문이라는 것. 참 놀라운 얘기였다. 이 말에 의하면 우리 눈이 감각할 수 있는 파장의 영역이 바뀌면 세상은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외선 카메라로 찍은 사람의 모습과 일반 카메라로 찍은 사람의 모습이 어떠했는가. 그러니 한번 상상해보라. 만약 인간의 눈이 가시광선과 전혀 다른 파장대의 대상을 인식하고, 귀가 가청영역과 전혀 다른 파장대의 소리를 듣고, 냄새와 맛뿐만 아니라 감촉할 수 있는 영역조차 지금과는 전혀 다르다면? 그래도 저 꽃은 있을까? 그리고 있다하더라도 저 모양 그대로 있을까?

저 꽃은 내 다섯 감각기관이 저 꽃을 감각할 수 있기 때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식에 의존(연(緣))해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꽃이 저 모양(형상)인 것은 내 다섯 감각기관이 저 형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식에 의존(연(緣))해서 그 형상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세상은 분명 ‘식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그리고 ‘식을 통해서만 그 형상을 갖는다.’ 이 말은 식이 달라지면 세상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보고, 듣고, 냄새만 맡을 수 있는 생명체나 맛만 볼 수 있는 생명체에게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파장만을 감관하는 곤충에겐?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 보이는 세상은 우리가 보는 세상과 다르다.

황하의 모래알 수만큼이나 많은

그러니 우리가 ‘있다’라고 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식 ‘안’에 있는 것이다. 식을 통해서 나타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유를 진행해보면, 우리에게 보이고 들리고 냄새 맡아지는 즉 인식되는 이 세상(불교에서는 ‘인간계’라고 한다)은 우리의 식에 연(緣)해서만 존재하는 세상이다. 경전에서 황하의 모래알 수만큼이나 많은 세상을 언급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냥 다양한 세상에 대한 얘기인 줄 알았다. 우리는 지구 말고 다른 세상을 경험해보지 않았으니. 하지만 유식무경을 생각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하나의 세상(예컨대 인간계)은 같은 식을 공유하는 존재들이 만들어낸 세상이다. 인간세계는 인간의 식으로 만든 세상이고, 도솔천은 도솔천에 사는 생명들이 만든 세상이고, 지옥계는 지옥계의 생명들이 만든 세상이다.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 세계를 ‘드러냈다’는 의미에 가깝겠다. 그런 식으로 수많은 세상이 존재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그 수많은 세상 중에 나의 식에 연하여(나의 식 안에) 나타난 작은 세상일 뿐이다. 유식사상을 체계화한 요가 수행자들은 선정상태에서 일상의 식과는 다른 식의 상태에 이를 수 있었고, 변형된 식의 상태에서 경험하는 세상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무착이 도솔천에 올라 미륵보살을 만난 것은(‘식의 시대를 열다’ 연재 글 참조) 그런 선정상태에서 가능했던 일이다. 유가사들은 선정의 체험을 바탕으로 식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세상이란 없다는 것을 알았고, 이를 ‘유식무경’이라 했다.

그럼 우리의 식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그건 모른다. 아니 알 수 없다. 무엇이든 ‘안다’라고 하는 것은 모두 우리의 식을 통해 아는 것이기 때문에 식 너머의 것을 안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식 너머의 세계는 현대과학이 발견한 것처럼 초끈이라는 요상한 것으로 되어 있을 수도 있고, 순간 생 순간 멸하며 있는 둥 없는 둥 알 수 없는 파동과 입자로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움직임만이 있는 세계, 때에 따라 사물이 되고 때에 따라 사건이 되면서 흐름만이 있는 세계. 그 알 수 없는 세계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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