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배움과 가르침의 목적은 자신이 아닌 세상과 타인을 향한 것. 그리고 거기서 관찰되는 문제와 결함을 고쳐나가는 것이 핵심이었다. 물론 이 자체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지만, 그 속에 나의 수신(修身)이 빠져 있다면 그 배움과 가르침은 공허한 외침에 그친다. 나를 바꾸는 것이 빠져버린 배움과 가르침! 사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때론 울기도 때론 웃기도 했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을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나온 웃음과 울음이 아니었다. 이 웃음과 울음은 구경꾼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다 나온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점점 냉정한 인간이 되어갔다. 이런 냉정한 인간들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휴식 또한 충분했을 리가 없다. 당연히 니체 철학의 입장에서 자신과 ‘예술적으로 거리 두기’가 가능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힘에의 의지’를 느끼고 실천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몇 년 전, 어느 날 아침 양치를 하다, 아랫니 가운데 잔뜩 끼어있는 치석을 보면서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라는 생각을 심각하게 한 적이 있다. 돌이켜보니, 이 작은 사건은 ‘내가 왜 공부를 하고 있을까’라는 의문을 푸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내 몸 하나 관찰하지 못하면서 세상에서 뭘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이후 나는 나를 관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질문이 지금의 공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나를 관찰하는 데 유용한 도구는 니체의 아포리즘들이다. 니체의 아포리즘을 읽는다는 것은 나를 위로 또 아래로 관찰하면서, 그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니체 읽기가 중요한 일상이 된 후 나는 별도의 휴식시간이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 자체가 휴식이고 나를 관찰하는 과정이었다. 니체의 아포리즘 속으로 빠져 들어가면서 나는 수없이 울고 웃었으며, 이를 함께 나누면서 그 웃음은 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