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있는 동안엔 먹고 살 일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고, 해가 지면 토굴에 들어가 명상을 하거나, 이전에 읽었던 책을 조용히 기억해 냅니다. 기록에 따르면 양명은 토굴에 석관을 만들어 놓고 생활했다고 합니다. 어느 순간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을까요. 여하간 죽음의 잠자리에서 사는 길을 찾아 나서는 모양새였던 셈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양명이 깨달은 것은 심즉리(心卽理), 요컨대 ‘마음이 이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농담삼아 말해보자면, 사실 뭐 깨달을 수 있는 게 마음 뿐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이치(심즉리)라는 이 깨달음은, 양명이 <대학>의 ‘격물(格物)’에 관해 주희와 해석이 갈라지게 되고, 나아가 지행일치가 아닌 지행합일을 주장할 수 있는 양명학적 사유의 바탕이고 근본입니다. 석서와 만나 나누었던 성인의 학설이란 것도 결국 이 부분에 관한 설명일 것입니다. 석서는 양명의 지행합일에 관한 강의를 몰래 들었지만 잘 이해할 수가 없어, 결국 양명을 찾아와 그 내용을 질문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별 차이 없는 것 같지만, 지행합일은 그만큼 ‘독특한’ 양명학의 프랜차이즈 개념이라 할 만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지행일치(주자)와 지행합일(양명)의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행일치는 지와 행을 일치되어야 할 두 가지(지와 행)로 봅니다. 반면 지행합일은 지와 행은 오직 ‘지=행’이 있을 뿐이며 이것은 분리 불가능한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더 간단히 말해,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行; 실천)은 곧바로 우리가 어떤 인식(知; 앎)을 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반드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지행합일을 얘기할 때면 제가 늘 예로 드는 게 담배를 끊지 못하는 말기 폐암 환자인데요. 양명학에서 보면, 그는 담배를 끊어야 하는 걸 알지만 아직 그 실천(행)이 앎과 일치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앎과 행은 분리 불가능한 일치이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끊어야 하는 걸 안다는 건 담배를 피지 않는다는 행위와 동전의 앞뒤처럼 분리 불가한 것입니다. 그럼 담배를 피고 있는 폐암환자는?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지행합일한 사람입니다. 그는 지금 그가 피우는 그 담배가 피는 즉시 자신에게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 앎에 일치하는 흡연을 계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