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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와 페스트] 존재, 습관의 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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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0-08-29 09:15 조회1,9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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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습관의 덩어리

복희씨 (감이당 금요대중지성)

오랑이라는 도시가, 그곳 사람들이, 그 중에서도 ‘키 작은 노인’과 ‘오통 판사’ 이 두 사람이 특히 이상한 걸까. 그래서 전염병이 창궐해 손 쓸 새도 없이 사람들이 죽고, 도시가 난장판이 된 상황에서도 그와는 무관한 듯 이처럼 습관에 절어 살고 있는 걸까.

‘키 작은 노인’과 ‘강남의 젊은이들’

수위 미셀 씨가 죽은 뒤, 사망자가 하루 40명까지 늘었다. 좀 수그러드는가 싶다가 갑자기 하루 동안 사망자가 다시 30명으로 늘어난 날, 정부에서는 드디어 “페스트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는 전보를 각 기관에 내려 보냈다. 그러다가 6월 말,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자 사망자 수가 매주 700명으로 폭증했다. 외출을 금지하는 포고문이 발표되고 벼룩을 전파시킬 위험성이 있는 개와 고양이들을 쏘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어느 날 아침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대부분의 고양이들이 죽었고, 나머지 고양이들도 그 거리를 떠나고 말았다.

바로 그날, 그 작달막한 늙은이는 습관대로 제 시간이 되자 발코니에 나타났는데, 적이 놀라는 눈치를 보이더니 몸을 굽히고 길 저 끝까지 골고루 살펴보고 나서 하는 수 없다는 듯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는 손으로 발코니의 철망을 툭툭 건드려 보았다. 그는 또 좀 기다리다가 종잇조각을 조금 찢어서 뿌렸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나왔다간, 얼마 후에는 갑자기 화가 치민 손놀림으로 창문을 쾅 닫으면서 집안으로 사라져버렸다. (까뮈, 『페스트』, 책세상, 2017, 160쪽)

그 뒤 며칠 동안 같은 장면이 되풀이되었고, 갈수록 노인의 얼굴에는 슬픔과 혼란의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이 사는 도시에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 한 주 동안 수백 명이 죽어나가고, 날마다 놀리던 고양이가 전염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로 모조리 총살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키 작은 노인은 습관으로 굳어버린 취미생활을 못하게 된 게 화가 나서 못 견딜 지경이다. 주변 상황에 저토록 무관심할 수가! 참 이상한 노인이다 싶지만, 종목이 좀 독특해서 그렇게 보일 뿐, 태도만 보면 그리 낯설지 않다.

(…) 주말을 맞은 강남 클럽의 상황은 딴 세상 같았다. 전날 새벽까지 수십 명이 줄을 섰던 클럽 앞엔 여전히 대기 줄이 이어졌다. 직장인 김모(28)씨는 “20대도 ‘사이토카인 폭풍’으로 인해 코로나19가 위험할 수 있다는 기사를 봤지만, 총리의 권고 수준의 말은 강제성이 없어서인지 와 닿지 않는다”며 “놀지도 못하게 할 거면 직장 출근이나 대중교통 이용 자체를 막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 (‘총리 대국민 담화 발표 비웃듯···불토 되자 클럽 몰린 20대’, 중앙일보, 2020.3.22.)

대구 신천지교회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자가 폭발적으로 나오고 종일 코로나19로 뉴스를 도배하던 때의 기사다. 오직, 직장인이 출근을 하고 대중교통이 시간 맞춰 움직이듯, 자신들 역시 주말이면 늘 클럽에 가서 춤을 추고 술을 마시며 즐겨 왔는데, 유독 자신들의 쾌락만을 문제 삼는 게 영 불만스럽다. 아직 주변에서 코로나19로 죽은 사람도 아픈 사람도 없고, 자신들은 건강하기까지 하니 전염병의 확산 운운하는 경고의 말이 “와 닿지 않는다.” 어디 이들뿐이랴.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서워 조심하고 있는 사람들도 이전의 일상이 그립기만 하다. 그 동안 길들여 놓은 습관대로 힘들이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그 시절, 지금 돌아보니 새삼 그 시절만큼 행복했던 때가 없었던 듯하다. 하루빨리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

‘오통 판사’와 ‘팜비치 사람들’

그러나 오통 씨는 그 정도 가지고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 페스트도 그에게는 헛수고였다. 그는 여전한 태도로 식당 안에 들어와서 자기가 먼저 앉은 다음 애들을 앞에 앉히고 여전히 점잖고 꾸짖는 언사로 그 애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162)

노인이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즈음, 오통 판사의 가족이 다시 그 호텔 레스토랑에 나타났다. 아내 없이 아이들만 데리고 왔다. 장모가 페스트에 걸려 세상을 떠났는데, 아내가 간호를 맡았던 터라 자가 격리 중이었다. 장모의 죽음과 아내 역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에게는 가족들을 데리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아이들이 식사 예절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범죄자 다스리듯 꾸짖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페스트와는 너무나 멀리 있다.

이렇듯 오랜 세월 몸에 밴 습관의 힘은 개인뿐 아니라, 집단의 구성원 모두를 지금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무관심하도록 만든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병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곳곳에서 일어난 마스크 착용을 거부하는 시위가 그 예이다.

신종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비말로 전파되는 전염병이다. 그래서 마스크를 쓰는 게 안전하다는 사실이 다양한 실험 결과 입증이 됐다. 그럼에도 미국을 비롯한 유럽인들은 유독 마스크 착용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미국의 하루 확진자가 5만명을 넘어서자 정부에서도 마스크 착용을 독려하고 나섰다. 플로리다 주에도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지침을 내렸고 어기면 벌금을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주민 공청회가 열렸고, 반대 의견이 쏟아졌다.

격앙된 목소리에 이유도 다양하다. “부끄러운 줄 아세요.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이건 미친 짓이에요. 미친 겁니다.” “적대적인 쿠바를 닮아가는 거냐.” “마스크 안 쓰는 건 속옷 안 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유다).” “사람이 숨 쉬는 건 신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어떤 것으로도 가릴 수 없다.”(중앙일보, 2020. 7. 2, ‘”마스크 쓰면 범죄 행위” “신의 뜻 거역” 정부에 화내는 그들’) 이후 플로리다 주에서는 미성년자 3명 당 1명꼴로 양성 확진을 받았다.(서울경제신문, 2020. 7. 18. ‘미국 플로리다의 놀라운 코로나 양성률…’)

이처럼 격렬한 반대의 바탕에는 오랜 기간 마스크는 아픈 사람이 쓰는 것이며, 범죄자들이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깔려 있다.

레스토랑 식사 예절이 뭐라고 눈앞에 닥친 페스트의 위험성은 안중에도 없으며, 마스크를 쓰는 게 뭐라고 신의 뜻까지 들먹이는 걸까. 삶을 돈독히 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구성원들이 공유해온 문화. 그것이 재앙 앞에서 존재 자체를 위기로 몰아넣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걸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들. 페스트균도 코로나 바이러스도 깰 수 없는 습관은 정말 힘이 세다.

‘죽음’을 ‘경험’해야 비로소

아들이 페스트에 감염되자 수용소에 격리된 채, 극심한 고통 속에 죽어간 아들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도, 장례를 치러주지도 못한 오통 씨. 아들의 임종을 지켜본 지인에게 “제발…, 필리프가 너무 호된 고생이나 안 했기를 바랍니다”라며 전혀 뜻밖의 말을 한다.

“나는 다시 수용소로 돌아갈까 합니다.” “아니, 어제 막 거기서 나오셨잖아요!”

“제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수용소에는 자원봉사 사무원 자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나도 뭔가 일을 좀 하려는 것입니다. 게다가 어리석은 이야기 같지만, 내 자식놈하고 헤어져 있다는 고통도 덜 느끼게 될 테고요.”(347)

아들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페스트가 보였고, 페스트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제서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마스크 쓰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아요. 나는 코로나 때문에 아들을 잃었어요.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돌아가셨어요. 세 명은 지금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어요. 이건 현실입니다.”

팜비치의 공청회장에서 마스크의 필요성을 이야기한 여성도 가족이 코로나로 갑자기 목숨을 잃지 않았다면, 수많은 반대 의견에 목소리를 보태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사람들은 대개 죽음과 같은 막다른 길에 닥쳐서야 비로소 습관에 절어버린 삶에서 깨어나 어떻게 살 것인지를 생각하는 존재인가. 그렇다면 죽음을 단시간에 경험케 하고 자신의 굳은 습관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드러내주는 재앙이야말로 생기 있는 삶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그런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는다는 걸 오통 판사와 팜비치의 그 여성, 그리고 수위 미셸이 말해 주고 있다. 그래서 미셸이 페스트에 걸리지 않고 오래도록 살았다면, 열흘 남짓 동안 보여준 그의 모습이 일생에 걸쳐 반복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잡다한 일상사가 끼어들어 스스로가 어떤 습관 속에 살고 있는지 모르고 살았을 뿐.

예상치 못한 재앙이 불러온 ‘긴박함’을 감안하면, 그런 의심이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간이 있을 때는 사유라는 걸 하는가. 때때로 죽음을 사유하는가. 그때그때 달라지는 조건 속에 자신을 던져 넣으며 굳은 습관과 작별하고 새로운 습관을 들이면서 생기 있게 살고 있는가. 그렇게 살고 있다면, 페스트든 코로나19든 미처 그럴 여유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선뜻 그렇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대개 죽음과 같은 막다른 길에 닥쳐서야 비로소 습관에 절어버린 삶에서 깨어나 어떻게 살 것인지를 생각하는 존재인가.

20대 초반 류머티즘이 발병하자 곧바로 병원을 찾았고 그 이후 10년간, 이 병을 치료해줄 명의와 명약을 찾아 헤맸다. 당시는 병 치료는 오로지 의사만이 할 수 있고, 환자는 의사의 말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던 때였다. 다른 상상력이 발동될 여지가 없었다.

‘내가 왜 내 몸을 알려고 하지 않았지? 내 몸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내가 아닐까?‘ 하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 건 발병 후 30년이 지나서였다. 그마저도 크고 작은 사고들로 다시 병상에 드러눕고, 세계경제위기로 노후가 불안해지는 경험을 한 뒤였다. 만약 큰 장애 없이 살았다면 죽는 순간, 지나간 시간들을 후회하며, 무언가를 원망하며, 그렇게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망할 놈의 쥐”들을 원망하며 죽어간 수위 미셸처럼.

생존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습관이 이처럼 단단히 굳어버리는 이유는 따로따로인 단어들이 하나의 덩어리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검색창에 키워드를 넣으면 곧바로 연관검색어가 쫘르륵 뜬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검색을 거듭한 단어는 그걸 뒤집을 만한 결정적인 사건을 만나지 못하면 연관된 단어들을 떼어낼 수가 없다. ‘병’이라는 검색어에는 ‘치료-병원-의사-약-수술’이라는 연관 검색어들이 오랜 세월 붙어 다녔고 나는 그걸 하나의 단어, 하나의 덩어리로 내면화했다. 어지간한 망치로는 깰 수조차 없는 단단하고 거대한 덩어리. 여기에 균열을 내기까지 30년이 걸린 것이다.

과연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는 바위처럼 굳어버린 습관의 덩어리를 깨 줄 망치가 될 수 있을까. 자문해 볼 일이다.

어지간한 망치로는 깰 수조차 없는 단단하고 거대한 덩어리. 여기에 균열을 내기까지 30년이 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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