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정규분포 곡선의 가운데가 볼록하다는 것은 거기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다는 의미다. 바로 그것이 ‘정상성’이 된다. 이런 정상성이 적용되는 것들 중에는 우리 건강과 관련된 것도 있다. 고혈압이나 당뇨병 등의 정상 수치, 그것이 이런 식으로 나온 거다. 여기서 우리는 갸우뚱하게 된다. 어떻게 건강과 병을 나누는 기준이 사람이 많이 몰려있는 수치냐 그렇지 않은 수치냐가 될 수 있는지 말이다.
뭐, 이런 지점에서는 크게 문제가 없다고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정상성이 삶의 가치라는 지점까지 확장되면 어떨까? 이런 것을 한 번 상상해 볼까, 살인자 마을 같은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인을 하며 살아가는 마을. 요컨대, 그곳의 정상성은 살인행위다. 자, 그렇다면 나도 그 정상성이라는 것에 맞춰 살아가야 할까. 누군가를 죽이며?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좀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돌이켜보면 지금 우리 현실과 그다지 먼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모두를 피폐하다 못해 황폐하게 만드는 입시 레이스의 악순환에 동력을 넣어주고 있는 것이 ‘다들’이라는 그 정상성이니 말이다. 어디 교육뿐이겠는가. 다들 명품을 가지고 있으니 나도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고, 다들 골프를 치니 나도 그것을 해야 할 것 같고, 다들 휴가는 해외에서 지내니 나도 비행기를 타야 할 것 같고, 다들 주식을 하니, 다들 부동산을 하니, 다들, 다들, 다들…. 그렇게 ‘다들’이라는 것에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우리 자신을 닦달하고 있는지, 그래서 얼마나 삶을 고달프게 하는지, 그래서 결국 남게 되는 그 허망함에 얼마나 몸서리치게 하는지.
그저 평범하게 쓰는 ‘다들’이라는 말을 떠받히고 있는 정상성. 오로지 그 정상성에서 떨어져 나오지 않기 위해 삶의 모든 동력을 쓰고 있는 현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우리가 아닌 줄 아는 그 길로, 아니 구렁텅이로 깊게, 더 깊게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물어야 할 때다. 정상성이 삶의 지표가 될 수 있는지를, 사람이 많이 몰려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우리 삶의 방향이 결정되는 게 어떤 것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