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보기에 이것은 매우 이상한 관점이었다. 어떤 것이 단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이유로 가치있는 것인 양 다루어지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해, 혹은 왜곡이었다. 가치로운 것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따르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른다는 사실이 그것이 가치로운 것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신문은 대중과 여론에서 가치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동력 삼아 움직인다. 여론을 읽고, 여론을 전달하기 그리고 여론을 만들어내기!! 이것이 저널리즘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신문의 기능은 단지 일어난 일을 전달하는 데 있는 게 아니었다.
이를테면 신문의 기사나 논평들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들. 국민의 뜻이 어떻다든지, 혹은 시민들의 생각이 이렇다는 식의 이야기들. 이런 언급들을 읽다 보면, 종종 내 생각이 그런 국민이나 시민들의 흐름과는 거리가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그래서 의아해지곤 한다. 국민의 뜻이라는 게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그 기사의 시민들이란 어떤 사람들인지.
이와 비슷한 우스갯소리가 하나 있다. 어떤 고등학교에 한 선생님이 있었다. 이 선생님은 3학년 전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1반 수업을 하는데, 애들이 너무 떠들더란다. 그래서 선생님 왈, 다른 반은 다 말을 잘 듣는데 너네 반만 떠드는구나! 그리고 이번에는 2반 수업. 거기서도 애들이 떠들자, 다시금 말하길, 다른 반은 다 말을 잘 듣는데 너네 반만 떠드는구나! 이렇게 선생님은 3반, 4반…9반, 10반까지 쭉 이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음…3학년은 열 개 반이 전부다. 그렇다면 그 말 잘 듣는 ‘다른 반’은 어디 있는 걸까? 학교 괴담?
사실 다른 반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선생님이 노린 효과는 다른 것이었으니까. 너네 반만 지금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어, 그러니까 이쪽으로 와, 라는. 그런데 여기서 이쪽이란, 바로 선생님이 바라는 방향이다. 실재적으로 다른 반은 없기에 말이다. 그럼에도 결국 이런 식의 말은 ‘다른 반’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괜히 우리 반만 밉보여 좋을 거 없잖아, 그래봤자 우리만 손해지, 그 ‘다른 반’이라는 곳에 가서만 시험 힌트 주면 어떻게 해. 그러니 우리도 ‘다른 반’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