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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리포트] 발생, 시작을 시작하는 생명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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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0-10-30 21:03 조회1,3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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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 시작을 시작하는 생명에게

김 해 완

최근에 쿠바 친구가 사진 한 장을 보내줬다. 검은 개 한 마리가 친구 집 거실에 드러누워 있고, 개 주위에는 털뭉치처럼 보이는 것들이 꼬물꼬물 모여 있었다. 세상에, 이 개가 그 개인가? 작년에 친구는 버려진 강아지 한 마리를 주워왔다. 엄마와 할머니는 못마땅하게 눈을 부라렸다지만, 인간 사정에 관심 없는 강아지는 촐싹 맞은 성인개로 쑥쑥 자라났다.

왜 시작을 보는 것은 기쁠까

그 ‘촐싹이’가 현재 일곱 마리의 새끼를 낳은 엄마가 되었다. 모든 걸 정지시킨 팬데믹 한복판에서도 촐싹이는 외출을 일삼으며 인륜지대사, 아니 ‘견(犬)륜지대사’를 성실히 이행했던 것이다. 새끼들은 엄마의 대단한 식성을 닮아서 성인 못지않게 먹어댄다. 팬데믹 시기에 쿠바에는 사람 입에 들어갈 쌀도 부족하건만, 친구는 새끼들 먹일 미음을 매일 두 번씩 끓인다. 학교도 못가는 시기에 졸지에 엄마가 되었다고 우는 소리를 한다. 말만 그렇게 할 뿐이고 친구는 사실 들떠있다. 이 힘든 시기에 달리 행복할 일이 없는 거다.

새끼란, 아기란 그렇다. 눈만 맞춰도 기분이 좋아지고, 방긋 웃기라도 하면 그 앞에서 별 주접을 떨게 된다. 미소 한 번 보기 위해서 온갖 수발을 들어야하는데도 그렇다. 그들이 온몸으로 내뿜는 ‘살고 싶다’는 메시지가, 때가 탄 내 속의 생의 의지를 다시 끄집어내주는 것 같다. 의대 생활을 할 때 이 어린 친구들의 덕을 자주 보았다. 칙칙한 꼰술또리오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활기차지는데, 첫 돌이 지나지 않은 동네 아기들이 정기 검진을 받으러 오기 때문이다. 그날이 되면 아기들은 울고 어른들은 웃는다. 엄마들은 대기실에서 육아정보를 공유하고, 의대생들은 아기를 달래느라 정신이 쏙 빠진다. 가족주치의는 자신이 임신 때부터 돌봐온 새 생명이 세상에 번듯하게 나온 게 대견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이런 경험이 학생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이니, 이후 쿠바 의대 졸업생들이 소아과와 산부인과로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이 두 전공은 쿠바 의료계에서 제일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의학이 항상 병듦과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순간만 만나는 것은 아니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을 지켜보는 특권도 지니고 있다. 생(生) 역시 고(苦)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긴다면 탄생 또한 예정된 삶의 고통을 내포한 사건이지만, 그럼에도 그 시작 앞에서는 마음이 기꺼워진다. 새 생명이 우리들보다 더 현명하게 고통을 통과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에 미래를 걸고 싶은 소원 때문일지도 모른다.

발생(發生)의 자리

우리는 모두 이 가능성을 지녔다. 세상에 올 때는 누구나 아기이기 때문이다. 출산일, 새 생명은 세상에 처음으로 얼굴을 내밀고 자기 운명을 마주한다. 일가친척의 요란스러운 축하 속에서 눈을 뜰 수도 있고, 살려주는 것 외에는 역부족인 부모를 만나서 베이비박스에 홀로 누워있을 수 있다. 인생이야기의 시발점이 여기에 찍힌다. 앞으로 아기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기질을 무기 삼아 천차만별의 인생을 일굴 테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눈에 보이는’ 범위에서 유효한 시작이다. 출산이 특별히 드라마틱하게 느껴지는 건 아기의 얼굴이 ‘보인다’는 가시적 효과 때문은 아닐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누군가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봐주는 ‘아기’가 되기 전부터 극적인 사건들은 이미 시작되었다. 세포의 입장에서는 임신이 출산보다 더 박진감 넘친다. 세포 하나가 한 명의 인간이 된다니, 정말 미친 일 아닌가? 출산이 휴먼드라마라면 임신은 SF 판타지 장르다. 임신 기간 동안 수정체의 길이는 사천 배, 무게는 이만 배 이상 증폭된다. 사이즈만 커지는 게 아니다. 다종다양한 신체 구조를 건설하는 세포들은 매일 화려한 변신을 거듭한다. 발생학을 공부하는 의대생은 머리를 쥐어뜯을 수밖에 없는데, 태아의 모습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벌써 머리와 발이 생겨났다면 말이다) 쉼 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들을 통과함으로써 생명은 비로소 미생(未生)에서 생(生)으로 나아간다. 엄마의 자궁을 떠나서도 살아갈 수 있는 몸체를 만든다. 이 시간은 의학에서 ‘발생(發生)’이라고 불린다. 문학적 맛이라고는 없는 건조한 단어지만, 새로운 생체가 창발되고 또 새로운 인생을 촉발시킨다는 의미를 담아보면 나름 적확한 표현이다.

서사를 이루는 기승전결의 ‘기(起)’는 아무것도 없는 진공상태에서 튀어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시작을 인식하게 되는 때는 그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이미 펼쳐진 이후다. 따라서 발생은 인생보다 선재(先在)한다. 이는 시간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 모두 해당된다. 발생이 시간상으로 먼저 일어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건들을 꿋꿋이 헤쳐 나갈 수 있는 심신(心身)의 구체적 토대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분리불가능하다면, 신체가 발생하는 순간은 마음의 씨앗이 심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발생의 시기에 한 번 조직된 신체는 평생 자신의 틀을 바꾸지 않는다. 더 강해지거나 더 악화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신체와 마음이 갈마드는 현장은 나중에 또 다루도록 하겠다.)

그렇게 아기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그가 이 세계에 오기까지 겪었을 여정을 무의식적으로 더듬는다. 이것은 생과 미생의 경계에서 아홉 달 동안 쉼 없이 자기변신을 꾀했던 세포들이 마침내 자궁 밖에서 이뤄낸 ‘자립’의 결과다. 이 자립이 어떤 인생을 추동하게 될지는 앞으로 천천히 드러날 것이다. 시작 이전의 시작. 여기가 발생의 자리다.

시작을 위한 죽음

이번 글에서는 발생의 역동성을 훑어보도록 하자. 발생을 이해하면 시작의 뜻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아기의 사랑스러움이 단지 ‘약함’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말이다.

우선 시작이 시작되려면 그만큼 강력한 조건이 필요하다. 발생의 자리는 혼돈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역동적인 만큼 불안정한 것이 발생이다. 한 번의 잘못된 자극이 세포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다. 눈 하나만 박힌 얼굴, 뇌가 없다시피한 몸체, 반만 닫히고 반은 열린 척수, 손가락 없는 손. 전래동화에서 도깨비나 요괴로 묘사했을법한 사례들이 발생학에서는 버젓이 실존한다. 실수, 불운, 상실, 불확실성의 운동은 모두 자연의 일부다. 태아는 이 무질서에 맞서야 한다. 자신을 비호의적인 변수로부터 보호해줄 조건을 찾아야 한다.

이런 태아의 방어 수단에는 죽음이 포함된다. 놀랍지 않은가? 인생에서 마주칠지도 모르는 실수, 불운, 상실, 불확실성의 대명사가 바로 죽음 아니던가? 그러나 아직 삶의 문턱을 ‘넘고 있는 중’인 태아에게는 생사의 대립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큰 의미가 없다. 생명력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상황에서는 세포들이 제때 죽어주지 않으면 오히려 전체가 위험해진다. 죽어야 하는 세포가 죽을수록 태아의 생명력은 계속 고양된다.

태아에게 죽음이 갖는 첫 번째 의미는 풍요다. 풍요는 정체 상태가 아니라 고갈되지 않는 자원의 순환 속에서 드러나는 힘이다. 죽고 또 죽어도 부족하지 않은 세포의 숫자, 시간과 함께 대다수의 세포가 쇠퇴하더라도 끈질기게 생명력을 간직해내는 소수의 잠재력. 이 풍요의 힘은 발생 초기 단계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아기가 어떻게 생겨나느냐는 질문은 초등학생도 답할 수 있다. 하나의 난자와 하나의 정자가 만나면 아기가 됩니다! 그런데 이 운명적인 만남 뒤에 백사장 모래알만큼 무수한 세포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잘 모른다.

잠시 생식세포를 살펴보자. 태아에게는 원시 생식세포(primordial germ cell)라는 게 있다. 이 세포는 여자 태아의 난소에서 난원세포(oogonium)로, 그 후 감수분열을 준비하는 난모세포(oocyte)로 변한다. 여아의 사춘기 때 두 번의 감수분열을 마친 난모세포는 마침내 ‘난자’가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죽음이 불가피하다. 태아 시기, 난원세포와 난모세포는 대부분 고사당한다. 칠백 만개까지 번식하지만, 난소 표면에 위치한 세포들을 제외하고 모두 퇴화된다. 결국 세상의 빛을 보는 난모세포는 약 사십 만개다. 이들은 감수분열을 위해 40년도 더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난자가 될 기회를 얻는 것은 겨우 사백 개다. 여성의 몸은 한 달에 딱 한 개의 난모세포만을 난자로 성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남성은 어떨까? 고환에 저장되어 있던 원시 생식세포는 사춘기 이후 정조세포(spermatogonium), 두 번의 감수분열을 겪는 정모세포(spermatocyte), 최종적으로 ‘정자’로 변신한다. 정모세포는 난모세포처럼 미리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매일 생산되는 몇 백 만 마리의 정자 중 절대다수는 자궁에 진입하지 못한다. 그저 여러 방법으로 낭비된다. 설령 운 좋게 진입한다 해도, 자궁경부의 강한 산성 때문에 대부분 시작부터 맥없이 죽는다. 힘겹게 이 문을 통과하고 배란된 나팔관까지 잘 찾아온 소수의 정자들은 또 선택해야 한다. 그들 중 딱 한 개의 정자만 난자와 수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환에 저장되어 있던 원시 생식세포는 사춘기 이후 정조세포(spermatogonium), 두 번의 감수분열을 겪는 정모세포(spermatocyte), 최종적으로 ‘정자’로 변신한다.

이런 의문도 든다. 왜 이렇게 많은 세포들이 죽음을 당해야 할까? 지나치게 비효율적인 낭비 아닌가? 요즘 세대처럼 출산을 거부하는 경우, 몇 천 억의 세포는 무덤으로 그냥 직행해버린다. 그러나 효율은 ‘목적’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생명은 종속되어야 할 목적이 없다. 발생은 개체의 생존과 종의 번식을 보장할 뿐, 그것들을 반드시 이뤄야할 목적으로 설정하지는 않는다. 최소한 사피엔스 종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 인간은 주어진 조건의 한계를 제거하고,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스스로 선택할 때 살아있다고 느낀다.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그렇다. 오직 규범적 동선만을 따라 몸을 움직이고, ‘건강’을 잃을까 벌벌 떠는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 ‘건강하다’고 느끼겠는가? 조르주 캉길렘은 이를 “건강은 인간들이 자신에게 어떠한 한계도 설정하지 않는 생명에서 느끼는 안도감”(조르주 캉길렘, 여인석 역,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그린비, 2018, 229쪽)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은 정상즉 환경과 그 요구 사항에 대해 적응하는 것을 넘어선다고 느낄 때에만 자신이 건강하다고 느낀다. (…) 만약 생명을 식물적인 생명에 한정시켰다면 인간은 너무 많은 신장·너무 많은 폐·너무 많은 부갑상선·너무 많은 췌장·너무 많은 뇌 조직을 갖고 있는 셈이다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순진한 형태의 목적론을 나타낸다.”  

(조르주 캉길렘, 여인석 역,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그린비, 2018, 227~228쪽)

건강은 한계를 뛰어넘는 힘이다. 주어진 규범을 거슬러 때로는 힘을 과용하고, 때로는 병에서 회복하면서 새 규범을 설정할 수 있는 주도권이다. 그렇다면 건강한 남녀의 생식세포도 다산(多産)을 목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것은 다만 가능성이다. 앞으로 생명이 발생하게 된다면, 그 시작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든 간에, 새 생명이 자기 한계를 극복하고 시작에 도전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기회를 준비해두겠다는 뜻이다. 무질서를 거슬러 자기완성을 향하는 생명은 단순히 “환경과 그 요구 사항에 대해 적응하는 것”으로는 발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패를 감수하는 도전이 필요하다. 따라서 ‘너무 많은 생식세포’는 생과 미생의 가능성을 모두 껴안는다. 생식만큼이나 생식하지 않을 가능성을, 부모의 선택과 인연의 조건이 맞물려 새 생명이 생겨나는 경우만큼이나 그렇지 않을 경우를 긍정한다.

기회의 풍요는 양뿐만 아니라 질로도 표현된다. 감수분열은 체세포분열과 달리 엄마세포와 딸세포 사이에 차이화를 촉발시키는 DNA 재결합(recombination) 과정을 포함한다. (지난 화 참고) 결과적으로 사백 개의 난자와 수백 억 개의 정자 중에서 DNA가 동일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각각의 난자와 정자는 모두 ‘다른 발생, 다른 시작’을 품는 씨앗이다. 이것은 백사장 모래알갱이처럼 무수한 세포들의 죽음을 각오하기에 가능한 풍요로움이다.

(감수분열 과정) 각각의 난자와 정자는 모두 ‘다른 발생, 다른 시작’을 품는 씨앗이다.

중심 없는 전개

죽음이 태아에게 갖는 두 번째 의미는 교정력이다. 이 메커니즘은 아포토시스(apoptosis)라고 불리는데, 세포의 자살을 뜻한다. 이것은 삶을 비관하는 자살이 아니다. 꼭 필요한 순간과 장소에서 사라짐으로써 나머지 세포들의 생존을 돕는 자발적 희생이다.

아포토시스가 태아의 몸을 정교하게 조각해내는 아름다운 예시는 수없이 많다. 가령, 모든 관(管) 모양의 장기는 자살한 세포들의 작품이다. 이들은 초기에는 속이 꽉 찬 원기둥 모양으로 형성된다. 외벽도 없고 내부 공간도 없다. 그러나 안쪽에 배치된 세포들이 일제히 사라지면서 비로소 빈 공간이 등장한다. 혈관, 림프관, 식도, 창자, 자궁까지 모두 이 원리로 만들어진다. 다른 유명한 예시로는 손가락과 발가락의 발생이 있다. 태아의 초기 손발은 애니메이션 호빵맨처럼 동그랗다. 사이사이의 세포들이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가락’이 생겨났다.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평생 호빵맨의 수족을 가지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손가락이 생겨나는 아포토시스 과정. 빨간색이 자살하는 세포들.)

자, 이제 중요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이 정교한 죽음은 어떻게 유도되는 걸까? 왜 하필 ‘이 부분’에서는 세포가 성장하는데 ‘저 부분’에서는 죽음이 일어날까? 여기에는 유도(induction)라는 메커니즘이 개입된다. 아포토시스 뿐만 아니라 다른 발생 메커니즘들도 유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유도 앞에는 “모든 메커니즘을 감독하는 메커니즘”(<Morfofisiología Tomo I>, Editorial Ciencias Médicas: La Habana, 2015, p.225)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헌데 놀라운 것은 이 감독 메커니즘에 ‘전체를 감독하는 법’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컨트롤 타워도, 매뉴얼도 없다. 이것은 철저히 중심 없이 전개되는 사건이다.

유도는 “세포와 세포 사이의 직접적인 상호작용”(같은 책, 같은 쪽)으로 정의된다. 세포 A와 세포 B가 만났을 때, 둘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변화가 유발되는 것이다. 세포 A가 신호물질이나 직접 접촉을 통해 접근하면, 세포 B는 외부 신호 포착을 담당하는 수용체를 통해 이를 받아들인다. 신호는 최종적으로 DNA 속 유전자 표현을 바꾼다. 이로써 세포 B는 다른 발생 메커니즘을 경험한다. 새로운 세포로 차이화되거나(differentiation), 크기와 숫자를 늘리거나(growth), 다른 장소로 이동할 것이다(migration). 혹은 조용히 사라질 것이다(apoptosis).

이때 상황을 주도하는 것은 세포 A처럼 보인다. A는 신호를 보내 변화를 ‘유도하는 세포(inductor)’이고, B는 변화를 당하는 ‘유도된 세포(induced)’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A와 B가 상호적으로 변화를 유도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서로가 서로의 유도자이자 유도당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둘의 관계는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만 유효하다. 그 국면이 지나간 후 다른 장소, 다른 시기에 마주친 A와 B는 반응할 능력을 잃어버린다. 즉, 유도반응은 A와 B뿐 아니라 나머지 세포들이 동시에 만들고 있는 ‘상황’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결국 발생의 드라마에는 중심 메커니즘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발견되는 것은 자잘한 세포들 사이의 끝없는 상호적 만남뿐이다. 시공간적으로 올바른 인연이 맺어진다면 그때마다 생명이 자궁 밖으로 무사히 나아갈 가능성은 커지고, 무질서의 힘은 줄어들 것이다. 혹시 아는가? 세포들은 태아가 앞으로 세상에서 마주하게 될 사건들을 미리 연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남, 성장, 이동, 변신, 죽음까지 말이다.

세계를 품는 결말 (혹은 미결)

이 드라마에 중심 메커니즘은 없어도 중심 주제는 있다. 바로 세상을 향한 태아의 사랑이다. 태아의 꿈은 자궁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외부로 나가 타자를 만나는 것이다. 아기집의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자궁 속에 남은 공간이 작아질수록 이 열망도 강렬해진다.

이 꿈은 발생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표현된다. 인간의 발생에서 가장 혁명적인 시기는 임신 1주부터 8주 사이, 배아 시기다. 이때 배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위는 무엇일까? 뇌도 심장도 뼈도 아니다. 몸속의 빈 공간, 체강(體腔)이다.

임신 1주차 때부터 수정체는 속에 빈 공간을 품는다. 이 공간은 배아로 발현될 태자배엽(embryoblast)을 감싸고 있다. 2주차 때 태자배엽은 상층(epiblast)과 하층(hipoblast)으로 나뉘는데, 이때 하층 밑에 위치한 공간은 난황낭(yolk sac)이라는 주머니로 바뀌고, 상층 가운데에는 양막강(amniotic cavity)이라는 공간이 새로 뚫린다.

(2주차 태아를 둘러싸고 있는 체강을 보여주는 그림)

3주차, 두 겹이었던 배아는 외배엽(ectoderm), 중배엽(mesoderm), 내배엽(endoderm)을 갖추며 세 겹이 된다. 이때부터 외부 공간을 배아의 몸속으로 끌어들이는 프로젝트가 개시된다. 외배엽의 중앙은 위쪽 ‘하늘’(양막강)을 향해 위쪽으로 말리면서 관(管)을 만들고, 가장자리 부분은 아래쪽 ‘땅’(난황낭)을 향해 양옆으로 말리면서 몸통 전체를 감싼다. 또 내배엽은 머리-꼬리 방향으로 휘는데, 그렇게 난황낭이 배아의 복부로 끌려 들어가 새로운 관(管)이 된다. 외배엽의 관은 중추신경계의 모태다. 머리 쪽은 뇌가 되고, 꼬리 쪽은 척수가 될 것이다. 내배엽의 관은 소화관이다. 머리 쪽은 입, 꼬리 쪽은 항문이 될 테다.

(3주차, 태아가 체강을 몸 속으로 끌어들이는 과정)

 

빈 공간은 무엇을 의미할까? 소통이다. 공간이 비었다는 것은 외부를 허용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배아를 관통하는 관 두 개가 하필 신경계와 소화계가 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테다. 이 두 계(系)는 앞으로 아기가 세상을 만나는데 핵심적인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아기는 외배엽의 선물인 뇌와 척수와 피부를 활용해서 주변을 더듬을 것이고, 감각신경과 운동신경을 번갈아 연습하면서 역동적인 세상 속에 어떻게 끼어들어야 하는지 익힐 것이다. 또, 내배엽 세포들이 꼼꼼하게 감싸준 소화관은 아기가 꿀꺽 삼킨 음식을 피와 뼈와 근육으로 경이롭게 바꿔낼 것이다. 면역체계에 필요한 유익한 박테리아도 키워줄 것이다.

발생은 세포 하나가 세상을 품는 이야기다. 시작이 풍요로운 생식세포였다면 그 끝은 세상과의 풍요로운 만남이어야 한다. 그러나 모두의 이야기가 같을 수는 없다. 드라마는 때때로 결말도 없이 끝나버린다. 수많은 태아들이 무질서의 운동 속에서 발생을 마치지 못하고 유산된다. 사고나 병에 휘말려서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하는 아기들도 많다.

세상이 먼저 태아를 거부하기도 한다. 거부의 죄는 여성의 어깨에 낙태라는 이름으로 새겨진다. 낙태가 살인이냐 의료행위냐를 두고 지금도 세계 많은 곳이 논쟁 중이다. 그러나 논쟁 끝에 정말 가려내야 하는 것은 ‘아기와 엄마의 권리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이분법의 답이 아니라, 아기와 산모 모두를 동시에 살리는 길이 무엇인가다. 자궁만 벗어난다고 해서 출생이 아니다. 아기는 자신을 세상과 연결시켜줄 튼튼한 다리가 필요하다. 가족이 필요하다. 체온을 나누고 밥을 해주고 지혜를 가르쳐줄 어른들 말이다. 그 역할을 해낼 수 없는 무력한 엄마가 홀로 무너지도록 방치하는 것은, 엄마도 아기도 살리는 길이 아니다.

소설 <사이더 하우스 룰(The Cider House Rules)>의 두 의사 이야기는 살리려는 마음 앞에 정해진 룰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20세기 초 미국, 의사 라츠는 사창가에서 아이를 홀로 지우려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여성들을 만난다. 그 후 그는 시골에 산부인과 병원과 고아원을 함께 세운다. 여성들에게 출산, 입양, 중절수술 중 선택권을 주기 위해서다. 라츠 의 후임자로서 시설 책임자가 된 의사는 이곳 고아원 출신인 호머였다. 그러나 호머는 라츠와 달리 중절수술을 끝까지 거부한다. 태아에게 시작의 기회마저 뺏을 수 없다고 믿는다.

라츠와 호머 중 누가 더 윤리적인가는 무의미한 질문이다. 두 사람 모두 생명 앞에서 똑같이 절실하다. 단지 라츠는 엄마를 먼저, 호머는 아기를 먼저 살릴 뿐이다. 이 두 마음은 대립이 아닌 순환을 이룰 수 있고, 또 이뤄야 한다. 입양과 파양을 반복하면서 속으로 죽어갔던 아이 호머를 멋진 청년 의사로 키워낸 것이 라츠의 사랑이었던 것처럼.

출발은 빛만큼 멀리 간다

과학적 상수는 생명을 예측할 수도, 좌지우지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의 시작을 더 경이롭게 기꺼워하는지도 모른다. 시작이란 무질서의 혼돈을 뚫고, 시의적절한 인연에 빚지며, 삶에 무조건적인 긍정을 보이는 것이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태아의 경험이 그러하다. 아기들은 이 풍파를 통과하고 나온 산증인들이다. 태어나지 못한 생명들 또한 성공하지 못했을 뿐, 이 모험을 감행했다. 시작이 시작하는 자리에는 끝도 맞물려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에게는 ‘예측되지도, 좌지우지되지도’ 않는 인생을 뚫고 가는 힘이 있다. 태아 때의 경험이 나중에 빛을 발할 수 있을까? 스페인어는 출산을 ‘빛을 준다(dar a luz)’고 표현한다. 이 빛은 세상의 빛이자 내면의 빛이다. 달라이 라마는 의식이 빛이 운동하는 것과 같이 움직인다고 말했다. “그것[마음]은 체험을 본질로 하는, 순수한 빛과 인식의 실재입니다.” “매순간의 의식이 자신의 본질적 원인으로서 이전 순간의 의식을 필요로”(클로드 B. 르방송, 박웅희 역, <달라이라마 평전>, 바움, 2008, 268~269쪽)하기에, 의식은 빛처럼 스스로를 말미암아 추동되며 과거로도 미래로도 끝없이 뻗는다. 이것이 참이라면 개체가 거쳐 간 모든 순간과 장소가 마음속에서는 연속체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빛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배아 세포 하나가 스스로 죽을 수 있는 용기가, 훗날 위기에 맞서는 청년의 용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지 않을 이유는 없다.

최근에 이 가능성을 믿어볼 일이 생겼다. 한 동네에서 매일 뻬스끼사를 하며 가깝게 지내던 의대 동기생 한 명이 있다. 지병도 없는데 이번 달에 급성백혈병이라는 뜬금없는 진단을 받고 열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팬데믹 때문에 병문안도 한 번 받지 못하고, 장례식도 없이 화장되었다고 한다. 스무 살에 생을 마친 친구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죽음은 언제든 어떻게든 찾아온다. 그렇지만 몇 달째 학교도 쉬다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좀 외로웠을 것이고, 젊은 나이에 아파본 적도 없으면서 몸이 빠르게 망가지는 걸 볼 때는 두려웠을 것 같다. 시작도 못한 소아과 의사의 꿈을 접을 땐 슬프지 않았을까?

아니다. 이것은 내 무지한 마음의 투영일 뿐이다. 혹시 아는가, 나보다 어린 이 친구는 어쩌면 내가 못 알아본 인생의 선배였을지도 모른다. 짧았지만 즐겁게 살았다고, 어리숙한 외국인 의대 친구들을 놀리는 게 재밌었다며 후회 없이 마지막 숨을 뱉었을 수도 있다.

친구의 과거와 나의 미래가 교차하는 시간을 상상해본다. 미래의 내가 혹시라도 나 자신이나 내 자식과 예상보다 빠른 이별을 하게 된다면, 일찍 마지막을 보낸 친구가 그의 지혜를 나눠주었으면 한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순간이 조금이라도 고통스러웠다면, 앞으로 무지를 덜어내며 살려는 나의 노력이 그의 고통도 덜 수 있기를 바란다. 상상과 바람일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진다. 마음이 빛처럼 출발한다면 불가능할 것도 아니다.

아기들은 이 풍파를 통과하고 나온 산증인들이다. 태어나지 못한 생명들 또한 성공하지 못했을 뿐, 이 모험을 감행했다. 시작이 시작하는 자리에는 끝도 맞물려 있는 것이다.

 

      <참고 도서>
  • W.Sadler, , Wolters Kluwer, 2012
  • <Morfofisiología Tomo I>, Editorial Ciencias Médicas: La Habana, 2015
  • Jone Irving, , Transworld Publishers Limited, 2000
  • 조르주 캉길렘, 여인석 역,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그린비, 2018
  • 제시카 스나이더 색스, 김정은 역, <좋은 균 나쁜 균>, 글항아리, 2012
  • 프란시스코 바렐리, 박충식 외 역 <윤리적 노하우>, 갈무리, 2009
  • 클로드 르방송, 박웅희 역, <달라이라마 평전>, 바움, 2008
      <그림 출처>
  • <Langman Embriología Médica>
  • <Morfofisiología Tomo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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