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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으로 보는 세상 이야기] 말나식과 ‘자아’라는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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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0-11-02 11:37 조회1,2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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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나식과 ‘자아’라는 환영



장현숙(감이당 금요대중지성)

‘나’를 사량하는 마음, 말나식

붓다는 ‘나’라는 개체는 몸의 활동(色)과 정신의 경험(受,想,行,識)으로 구성된 다섯 무더기(五蘊)라고 한다. 개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나’는 개체라고 할 수 없다. 개체는 독립하여 존재하는 개물(個物)의 의미인데, 일단 몸(色), 느낌(受), 생각(想), 감정(行), 인식(識) 중 어느 것 하나만을 떼어 ‘나’라고 할 수 없는 데다, 이것들조차 주변과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의 활동도 정신의 경험도 주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의 장(場)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멀쩡히(^^;) 우리의 존재성을 이해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나(我)’는 ‘타(他)’와 따로 떨어져 개별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주변과 연기적으로 관계하며 존재하는 몸, 느낌, 생각, 감정, 인식의 무더기로 되어 있는 우리에게 어떻게 단일한 ‘나’라는 관념, 즉 자아의 관념이 생겼을까?

유식은 여기서 말나식(末那識)을 얘기한다. 말나식은 여덟 개의 식 중에서 아뢰야식 다음으로 심층에 존재하는 식이다. 말나는 ‘사량(思量)하다’는 의미다. ‘사량’은 깊이 생각하여 헤아린다는 뜻이다. 그런데 말나식은 무엇을 사량하기에 ‘말나’라는 이름을 가졌을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말나식은 ‘자아’를 사량하는 마음이다. 다시 말해 말나식은 자기에게 얽매이고 자기중심으로만 사량(사고)하는 마음이다.”(『유식삼십송과 유식불교』 참조)

아뢰야식엔 분별의 경향성인 명언종자가 저장되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분별의 경향성이 현행(現行)시키는 최초의 즉 근원적인 분별은 무엇일까? 바로 ‘나’이다(‘아뢰야식과 윤회’ 참조). 최초의 분별, ‘나’라는 생각. 생각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 말나식은 생각하는 식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생각은 제6 의식, 즉 표층의식의 작동이다. 말나식은 이 표층의식 뒤(또는 심층)에서 작동하는 무의식적 마음 같은 것이다. 의식화되진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작동하는 근원적 분별. 이 근원적 분별에 의해 ‘나’가 생기면, ‘타(他)’는 ‘나’에 상대해 저절로 생긴다. 말나식은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나’에 집중하는 마음, 즉 ‘나’를 사량하는 마음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보든, 어떤 것을 듣든, 어떤 것을 생각하든, 어떤 움직임을 하든, 그 어떤 것에도 ‘나’를 사량하는 마음은 같이 일어난다. 컵을 보더라도 ‘내가 컵을 본다’, 음악을 들어도 ‘내가 음악을 듣는다’, 춤을 추어도 ‘내가 춤을 춘다’는 마음이 함께 일어난다는 것. 이렇듯 우리의 모든 생명활동, 일상의 행위와 표층의 감정, 생각 뒤에는 언제나 ‘나’라는 것을 얽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말나식이 작동한다. 유식을 체계화한 요가 수행자들(瑜伽師)은 선정체험을 통해 인간의식의 깊은 심층에서 언제나 자기에 집착하는 마음을 봤는데, 그것을 ‘나를 사량하는 마음’이라고 해서 말나식이라 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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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라는 환영

말나식은 아뢰야식의 종자에서 현행된 것이다. 그러니 말나식의 ‘나’를 사량하는 마음은 아뢰야식의 종자가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종자에 연(緣)하여 생겨났다. 그렇다면 아뢰야식에 분별의 경향성(명언종자)이 저장되어 있는 한 우리는 ‘나’를 사량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태어나서 지금까지를 생각해보라. 나라는 생각을 늘 떠올리며 사는 건 아니지만, 활동하고 경험하는 매순간의 다름 속에서도 늘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내가 있는 것’ 같지 않았는가. 나란 매일 매순간 변하는 몸(色)과 매일 매순간 변하는 정신의 활동(受,想,行,識)으로 되어 있다. 즉 활동으로서의 몸, 활동으로서의 느낌, 활동으로서의 생각, 활동으로서의 감정, 활동으로서의 인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일상의 나이다. 그런데 그런 활동 뒤(심층)에 ‘나’를 사량하는 마음이 항상(常) 동반하다 보면, ‘영원불변한 자아’라는 환영(幻影)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환영’이라고 한 것은 실제로 그러한 것, 즉 영원불변한 것은 없기 때문이고, ‘자아’라고 한 것은 스스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뢰야식의 종자에 연(緣)하여 현행한 근원적 분별의 마음이 ‘나’라는 마음을 임시로 세웠을 뿐인데(由假說我法), 그 임시로 세워진 ‘나’를 항상 사량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자아’이다. 그러니 ‘자아’는 말나식이 만든 환영이다.

말나식은 아뢰야식의 종자에 연하여 ‘나’를 사량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아뢰야식은 말나식의 그 사량하는 마음을 다시 종자로 저장한다. 마치 안과 밖이 맞물려 영원히 돌아가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아뢰야식의 종자와 말나식의 ‘나’를 사량하는 마음은 ‘현행’과 ‘저장’이라는 돌고 도는 관계를 끊임없이 맞물며 반복한다. 아뢰야식에 저장된 분별의 경향성(종자)이 완전히 전의(轉依)되는 아라한(불교의 수행단계 중 최고의 경지)이 될 때 까지, 세세생생 생을 윤회하며, 서로가 서로에 의존하며 맞물려 돌아간다. 이러한 아뢰야식과 말나식의 돌고 도는 관계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인데, 아라한이 되어야 해탈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만큼 ‘나’를 사량하는 마음은 질기고도 질기며, 그만큼 자아에 대한 환영은 깊고도 깊다는 것이다.

네 가지 번뇌와 함께함

말나식은 자기(我)에게 얽매여 자기중심으로만 사량(사고)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자기중심적이라고 하니 부정적으로 느껴지지만, 사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세포가 자기중심적으로 자신을 사량하기 때문이다. 나(我)와 타(他)의 테두리를 짓고 그 경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생명 아닌가. 그러니 우리가 무사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건 어쩌면 자기중심적인 말나식 덕분일지도 모른다. 말나식은 살아있는 한 언제나 작동한다. 심지어 스스로 생명을 끊으려는 순간에도 작동하는데, 나무에 목을 매 자살하려는 사람이 산사태로 큰 돌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냅다 도망치거나, 절벽에서 떨어져 자살하려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밀면 ‘엄마야’ 하며 멈칫하는 것은, 죽기 전까지는 언제나 작동하는 말나식 덕분이다. 우리의 표층의식(제6 의식)은 생각으로 자신을 죽일 수 있지만, 말나식은 ‘걸음’으로 ‘식겁’으로 자신을 살리기도 한다. 그런데 유식은 때로 우리를 살리기도 하는 이 말나식이 오염(染)되어 있다고 한다. 오염되어 있다니? 이를 ‘덮여있다(有覆)’라고도 표현하는데, 왜 오염되었고 또 덮여있다고 할까? 그건 말나식이 우리의 생활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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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우리 생활에서 말나식은 어떻게 작동하고 있을까? 즉 ‘나’를 사량하는 마음인 말나식으로 인해 우리는 어떤 마음작용(心所)을 일으키고 있을까? 바람은 바람 자체로는 바람을 알 수 없다. 바람이 나무를 스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구름의 모양을 바꿀 때 바람이 있음을 아는 것처럼 말나식도 작용이 있어야 그 존재함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여기서 유식은 말나식이 일으키는 네 가지 마음작용을 얘기한다. 자아가 본래 공하고 무상함에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마음작용(我癡), 자아를 구상하여 그 자아를 실체화하는 마음 작용(我見), 타인과 비교해서 자신은 높이고 타인은 낮추는 마음작용(我慢), 무조건적으로 자기만을 사랑하고 집착하는 마음작용(我愛). 이를 네 가지 번뇌라고도 하는데, 유식은 이 네 가지 번뇌는 말나식이 작동하는 한 언제나 일어나는 마음작용(四煩惱常俱)이라고 한다. 말나식이 작동하는 한 항상 일어나는 마음작용! 이 말을 잘 새겨보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생각해보라. 말나식은 죽기 전까진 계속 작동하는 마음인데, 네 가지 번뇌가 ‘항상(常)’ 함께하고 있으니, 우린 죽기 전까진 기본적으로 네 가지 번뇌에 항~~상, 언제나, 에브리 모먼트(every moment) 노출되어 있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오염(染)되고 덮여있다(覆)고 하는가? 물이 한번 잉크에 오염되면 항~~상, 언제나 잉크로 덮여 잉크물로 있는 것처럼.

그러므로 말나식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있는 그대로 듣지 못하게, 있는 그대로 냄새 맡지 못하게, 있는 그대로 맛보지 못하게, 있는 그대로 감촉하지 못하게, 있는 그대로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있는 그대로’ 보고 듣는다는 것은 ‘나’라는 분별에 집착하지 않을 때야 가능한 것이다. 한마디로 분별의 기준이 없을 때 가능하다. 그런데 말나식은 기본적으로 ‘나’를 사량하는 마음, ‘나’에게 초점 맞춘 마음이니, 어떻게 ‘있는 그대로’ 보고 들을 수 있겠는가. 단순히 컵 하나를 볼 때도, 컵을 보는 내가 무상하다는 사실을 덮어버려 알지 못하게(癡) 하고, 컵을 소유하고 있는 ‘나’가 따로 있다(見)고 생각하게 하며, 컵을 가진 나와 타인을 비교(慢)하게 하고, 그 나에게 애착(愛)하게 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어렸을 적, 색깔이 물든 종이(셀로판지)로 세상을 본적이 있다. 노란색이 물든 종이로 보면 세상은 모두 노랗게 물들어 있었고, 빨간색이 물든 종이로 보면 세상은 모두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말나식은 마치 ‘나’로 물든 종이로 세상을 보도록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그 물든 만큼 세상을 왜곡하여 보는 것이다. 이 왜곡된 마음이 번뇌를 일으킨다.

watercolour-255615_640말나식은 마치 ‘나’로 물든 종이로 세상을 보도록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그 물든 만큼 세상을 왜곡하여 보는 것이다. 이 왜곡된 마음이 번뇌를 일으킨다.

그런데 사실, 보통 사람들은 내가 무상하다는 것을 모른다(我癡)고 해서 괴롭진 않다. 아니 괴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도 내가 무상하다는 것을 모른다고 해서 괴롭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모르니 그냥 사는 거다.(^^;) 또 내가 있다고(我見) 해서 괴롭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내가 있다니 안심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나를 애착한다(我愛)고 해서 괴롭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기도 하니까. 그러나 비교하는 마음은 정말이지 괴롭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잘났다(我慢)고 비교하는 마음엔 또 다른 사람보다는 못났을 수도 있다는 마음이 품어져 있다. 지금의 ‘잘났음’은 언제든 ‘못났음’으로 바뀔 수 있다. 미(美)는 추(醜)로, 많음은 적음으로, 높음은 낮음으로. 이건 괴롭다. 그런데 이 비교의 마음은 나를 집착하고(愛), 내가 있다는 생각(見), 나의 무상함을 모르는(癡)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아만은 아치, 아견, 아애와 사실 같은 마음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네 가지 번뇌는 우리가 알든 모르든 항상 같이 작용하며 우리를 괴로움에 빠뜨린다.

‘나를 사량하는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

네 가지 번뇌는 말나식이 있는 한 언제나, 항~~상 작용하는 마음이다. 이 번뇌들은 다른 많은 번뇌들을 만든다. 그러니 모든 번뇌의 근원은 나를 사량하는 마음인 말나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생명을 살게도 하고 괴롭게도 하는 말나식이라니. 참 아이러니하다. 어쨌든 말나식은 아뢰야식의 종자가 전의되기 전엔 없어지지 않는 마음이다. 종자가 전의되지 않았다는 것은 업의 윤회를 계속한다는 것이므로, 말나식은 윤회하는 한 깊은 심층에서 언제나 자아라는 환영을 만들고 우리를 괴롭게 만든다. 우리의 태생적으로 괴로움을 품고 태어났다. 그래서 태어남(生)이 네 개의 괴로움(생로병사, 四苦) 중 하나였나?

태어난 이상 늘 괴로울 수밖에 없다면 그냥 괴로운 채 살아야 하나? 어차피 남도 괴롭고 나도 괴로우니 피장파장이라며 포기? 그건 아닐 거다. 붓다의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은 거기서 벗어나는 큰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번뇌가 ‘나’를 사량하는 마음인 말나식에서 일어난다면 그 마음부터 살펴보면 되지 않은가.

말나식은 생과 함께 시작(隨所生)하니 태생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생명활동이나 일상의 행위, 생각, 느낌, 감정 등에 무의식적으로 작동한다. 그렇지만 이를 잘 살펴보면, 생명활동과 함께 작동하는 ‘나’를 사량하는 마음(‘구생기의 나’라고 한다.)과 일상적 행위나 생각, 느낌, 감정과 함께 작동하는 ‘나’를 사량하는 마음(‘분별기의 나’라고 한다)으로 구별할 수 있다. ‘구생기의 나’는 죽으려는 순간까지 ‘걸음’으로도 ‘식겁’으로도 작동하는 마음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생명자체를 지키기 위해 발달한 마음이기 때문에 수행으로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아무리 ‘나라는 건 없다(無我)’, ‘마음이 올라올 때 잠시 올라오는 어떤 느낌을 나로 생각할 뿐이다’는 얘기를 들어도,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바로 구생기의 나를 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야말로 생(生)과 사(死)를 옷 꺼풀을 입고 벗는 것처럼 오고가며 내 몸이 태어난 세계에 묶이지(所繫) 않을 수 있는 마음의 영역이다. 그러니 구생기의 나(생명현상) 수준에서까지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너무 높고 멀어 보인다. 도대체 언제… 그러니 지금은! 일단! 모른 체 하자.^^;

bebe-3401079_640말나식은 생과 함께 시작(隨所生)하니 태생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분별기의 나’는 그렇지 않다. 사물이나 사건과 맞닥뜨릴 때 알아차릴 수 있는 마음이다. 그러니 우리는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사물이나 사건과 마주칠 때 그때 올라오는 ‘나’를 사량하는 마음부터 살펴 ‘나의 무상함(無我)’을 본다면 세세생생 윤회하며 괴로워하는 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윤회도 윤회지만, 지금 당장 겪는 수많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구생기의 나까지 한방에 그리고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매 찰나 ‘나의 무상함’을 아는 만큼 그 만큼 번뇌도 줄어든다면 한번 시도해볼 만한 일이지 않은가. ‘나의 무상함’과 번뇌. 그래서 붓다는 무아를 그리도 강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번뇌에서 벗어나는 모든 출발은 ‘자아’가 환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를 사량하는 마음인 말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있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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