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생명력이 바닥을 치는 상태에서 만나는 세상. 그 세상 또한 자신들만큼이나 쇠락한 것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소진된 생명의 눈은 모든 것들 속에서 쇠락의 기운을 읽어내는 것이다. 하여 데카당스의 세기말적 시대 감성은 사회 그 자체보다는, 그들 자신의 상태를 훨씬 더 많이 표현하고 있다.
데카당스는 이 모든 것을 거꾸로 이야기한다. 만약 자신들의 생명력이 약화되어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 망조가 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니체는 단호히 말한다. 세상에 망조가 들었다는 것은 결코 원인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징후이자 결과. 뿌리는 데카당스의 병약함이다.
데카당스는 자신의 이 뿌리를 보지 못한다. 아니, 보려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병약한 생명력을 세상을 떠넘기며 합리화할 뿐이다. 삶의 가치를 생산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나에게는 가치를 생산할 힘이 있다. 다만 이 세상이 썩어빠졌고, 해서 곧 몰락할 것이기에, 굳이 가치를 생산할 필요가 없을 뿐이다. 하지만 이는 니체씨의 찰떡같은 비유대로, “그러한 자들은 식탁에 앉으며 아무것도, 왕성한 식욕조차 갖고 오지 않는다! 그러면서 “모든 것은 덧없다!”라고 비방하는 것이다.”
데카당스, 그들은 스스로 삶을 만들어갈 기력이 없을 뿐이다! 생명력의 소진, 자기 창조적인 힘의 퇴화. 죽어가는 건 세상이 아니라, 너다! 하지만 데카당스는 이 모든 것을 뒤집는다. 자신에게 가치 창조의 힘이 없으면서도 모든 가치를 보잘것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약자=데카당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