革, 已日乃孚, 元亨, 利貞, 悔亡
혁괘는 날이 지나야 이에 믿게 되니 크게 형통하고, 올바름을 굳게 지키는 것이 이로우니 후회가 없다.
初九, 鞏用黃牛之革.
초구효, 황소가죽을 써서 단단히 묶는다.
六二, 已日乃革之, 征吉, 无咎.
육이효, 날이 지나서야 이에 크게 바꿀 수 있으니, 그대로 해나가면 길하여 허물이 없다.
六三, 征凶, 貞厲, 革言三就, 有孚.
구삼효, 그대로 나아가면 흉하니 올바름을 굳게 지키고 위태롭게 여기는 마음을 품어야 하리라. 개혁해야 한다는 공론이 세 번 이루어지면 믿을 수 있다.
九四, 悔亡, 有孚, 改命吉.
구사효, 후회가 없으니 진실한 믿음이 있으면 천명을 바꾸는 것이 길하리라.
九五, 大人虎變, 未占有孚.
구오효, 위대한 사람이 호랑이처럼 변화시키는 것이니, 점을 치지 않아도 믿음이 있다.
上六, 君子豹變, 小人革面, 征凶 居貞吉.
상육효, 군자는 표범처럼 변하고 소인은 얼굴만 바꾸니, 끝까지 나아가려고 하면 흉하고 올바름을 지키고 있으면 길하다.
나는 근래에 공부의 비전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감이당>에서 공부한 8년 동안 수시로 받았던 질문이 ‘왜 공부하는가?’이고, 나도 살림하랴 과제하랴 치일 때마다 ‘내가 과연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이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곤 했다. 처음 공부하러 왔을 땐,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혁명적 기개로 열정이 가득했으나, 힘들 때마다 멈칫거리고 그 질문들에 답을 찾아가며 한 걸음씩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 또 다시 한 걸음을 떼기 위해 질문을 한다. ‘공부의 비전이 무엇이냐’고.
그럼 먼저 내게 공부가 무엇이었나를 돌아보아야 한다. 내게 공부는 ‘나를 바꾸는 변혁’이었다. 수동적 삶에서 능동적 삶으로, 노예에서 주인으로 살 수 있는 힘이 공부에 있다고 믿었다. 세상을 바꾼답시고 헛짓거리 하지 말고 먼저 나를 바꿔서 일상의 혁명을 이루고 나면 나는 좀 더 단단해지고 어지러운 사회 변화에 부화뇌동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당시에 나는 게을렀고 무기력했으며 불만이 많았다.
일상 속에 ‘혁명’이란 단어를 가져오면 너무 거창한 것 같지만, 사실 나로선 우주가 180도 바뀌는 일이었다. 대학 땐 농동아리활동, 졸업 후엔 생명평화운동을, 결혼 후엔 지역에서 진보정당 활동을 하면서 나의 시선은 온통 밖으로 향해 있었다. ‘세상을 바꾸자!’ 이것이 나의 오랜 구호였다. 하지만 분노 뒤엔 항상 그만큼의 열패감이 따라온다. 모두가 부자 되기를 열망하는 세상에서 무기력한 신체로 표류하다가, 다시 대통령선거가 있던 겨울에 그만 절망했다. 그 때 가장 화가 났던 건, 내가 빠져 있는 어떤 이분법적 환상 속에서 분노와 좌절을 반복하고 있는 무기력한 내 모습이었다. 이제 나를 바꾸지 않으면 더 이상 못 살 것 같았다. 이렇게 공부의 장과의 접속은 일종의 회피이기도 했고 다른 존재가 되고 싶은 열망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