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글을 쓸 때 ‘인용문’을 중요시한다. 좋은 인용문은 나의 문제를 객관적이면서도 깊게 볼 수 있는 참조틀이 된다. 인용할 문장을 잘 선택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나의 사유를 집중하면 좋은 글이 나올 수 있다. 우리가 주로 읽는 것은 ‘고전’이니, 이 책들에는 훌륭한 사상과 문장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글을 써야 할 때가 다가오면 이 책 저 책, 혹은 이 페이지 저 페이지를 오가며 ‘좋은 표현’과 ‘좋은 사상’을 메모하고 끌어모은다. 그런데 딱 여기까지이다. 그동안 메모하고 끌어모은 글들은 대개 나의 사유를 넓고 깊게 해 주는 것으로 이어지는 경우보다는, 마치 난공불락의 큰 산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줄 때가 솔직히 더 많다. 감당하기 어려운 ‘사상’과 ‘표현’ 앞에서 그저 시간만 보내다 억지로 양만 채운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왜 이럴까? 예전에는 답답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 그 이유를 알겠다. 내가 인용한 문장들은 분명 ‘보석’이 맞다. 그야말로 주옥같은 문장들이다. 하지만 나는 이 보석 주변에 납덩이와 같이 무겁고 빛바랜 나의 사유와 글을 올려놓고 말았다. 스스로 사유를 넓히려는 노력을 해야 할 딱 그 시점에 나의 사유를 더 끌어가지 않고 인용문으로 그 노력을 대신한 것이다. 훌륭한 사상과 문체는 그 사상과 문체가 살아날 수 있는 훌륭한 지반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좋은 문체와 사상을 가져오고 싶다면, 나의 사유를 거기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나의 사유와 문체가 내가 인용한 사상가의 그것이 피어날 수 있는 풍성한 바탕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나’라는 존재가 니체의 사상과 문체를 받아들여 자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 존재의 질을 높이지 않고서는 니체를 읽고 쓸 수 없다. 내 존재의 질이 높아지는 만큼 니체가 읽히고 또 쓸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나의 공부의 과제는 분명해진다. 내가 니체를 읽는다는 것, 니체의 문장을 필사하고, 때론 암송한다는 것은 니체의 사상과 문체가 나에게로 와서 자랄 수 있도록 나를 만드는 활동이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내가 만들어지는 만큼 나는 니체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또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