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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와 페스트] 팬데믹을 통과하는 마음의 행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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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0-12-11 09:51 조회1,6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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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을 통과하는 마음의 행로 (1)

복희씨 (감이당 금요대중지성)

서울 멈춤! 최근 들어 신규 확진자가 3~4백을 넘어 6백 명에 육박하자 서울시에서 벌이고 있는 방역 캠페인이다. 시는 오늘부터 3주 동안 사회적 거리두기를 2단계에서 2.5단계로 상향 조정했다. 올 초부터 일 년이 다 되도록 코로나의 세력이 오르내림에 따라 거리 두기 단계 역시 상향, 하향을 반복하고 있다. 그에 따라 우리들의 감정도 부침을 겪으면서 여기까지 왔다. 이쯤에서 오랑 시민들이 일 년 가까이 페스트와 함께 겪은 감정의 곡선에 지금 우리의 감정 상태를 비춰 보고자 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팬데믹과 함께 살아가야 할지 모르지만, 그 길을 가는 데 참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불쾌한 방문자

시민들은 자기들에게 닥쳐오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별이라든가 공포라든가 하는 공통된 감정은 있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개인적인 관심사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아직 아무도 그 질병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은 자기 습관을 방해하거나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에 대해서 특히 민감했다. (카뮈, 『페스트』, 책세상, 2017, 112-113쪽)

인용문 출처를 가리면, 코로나19 관련 글이라 해도 그대로 믿을 내용이다. 처음 코로나가 시작됐을 때, 이렇게 일 년이 다 되어가도록 우리 일상을 지배하리라고는 생각지 못 했다. 지금이 21세기 첨단 과학기술의 시대라 그걸 믿거라 해서 그런 건 아닌 듯하다. 재앙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막상 그것에 맞닥뜨리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갖게 되는 일반적인 심리다.

100여 년 전, 인구 20만의 오랑 시. 그곳에 열병이 발생한 지 3주일 만에 300여 명이 사망했다. 시민들은 그게 어느 정도의 위험성을 말해주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계획에 차질이 생겨 조금 불편한 정도였다. 그러나 곧 퇴치되리라 생각했다. 불안감은 좀 있었지만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출퇴근 시간이면 여전히 전차는 만원이었다가 낮이면 한산해졌다. 점심시간이면 식당들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저녁이면 영화관 앞에 길게 줄이 늘어서 있고, 술집마다 사람들로 왁자지껄했다. 다시 날이 밝으면 출근을 했다.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여행 계획을 세웠다.

올 2월 대구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수백 명에다가 사망자도 발생했다. 정체 모를 바이러스로 겁을 먹고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해결되리라 믿었다. 항공권을 예약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우리들 역시 코로나를 일상에 잠시 잠깐 끼어든 불쾌한 방문자라 생각했다.

우리들 역시 코로나를 일상에 잠시 잠깐 끼어든 불쾌한 방문자라 생각했다.

공포의 엄습

바로 그 일요일부터 우리 시에는 상당히 전반적이고 심각한 일종의 공포가 생겨났는데, 혹시나 시민들이 진실로 자기네들의 처지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시의 분위기가 약간 변화하기는 했다. 그러나 사실, 분위기가 변한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변화가 있었는지,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141-142쪽)

6월 말,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됐다. 오랑 시에서 매주 700명에 가까운 희생자가 나왔다. 그해 여름처럼 날씨의 변화에 민감했던 적이 없었다. 날이 더워지면 전염병이 더 기승을 부릴 거라는 생각에 잔뜩 겁을 먹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어느새 그 여름이 와버린 것이다. 불타는 하늘은 매일 쌓이는 100여 구의 시신 못지않게 시민들에게 공포를 자아냈다.

시내 곳곳에 외출을 금지하는 포고문이 나붙었다. 해변 출입도 차단되고 해수욕마저 할 수 없게 되었다. 더위와 페스트라는 이중고에 숨이 막혔다. 시민들은 혼란과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쳤다. 업무차 잠시 체류 중이던 사람들은 오랑을 탈출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고, 갑자기 자기 집 창문을 열고 괴성을 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느닷없이 박하정제가 약방에서 삽시간에 동이 나기도 했다. 전염병 예방에 좋다는 소문이 퍼진 때문이다.

날은 점점 더워졌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공포감을 못 이긴 사람들이 사치와 향락을 좇아 군중 속으로 몰려갔다. 정오가 되면 식당은 만원을 이루었다. 특히 고급 식당으로 사람들이 몰렸고, 고급술과 비싼 안주를 경쟁하듯이 주문했다. 저녁이면 모든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시끄러운 소리로 잡담을 해댔다.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졌고, 쌍쌍의 남녀들은 술집에서 호텔에서 서로를 불태웠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오늘이었다. 그 시간을 오래도록 늘여보려고 모두가 기를 썼다.

만약, 우리가 지금 코로나19 팬데믹을 겪고 있지 않다면? ‘그땐 의료 수준이 형편없어서 저렇게 공포에 떨고 있었구나. 절망감을 감당 못해 사치와 향락에 자신을 던져버렸겠지. 그렇게 해서라도 죽음의 공포를 이기려 몸부림치고 있는 거다.’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 태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 안도했을 테고.

그러나 현재, 세계는 한 마디로 공포와 광란의 아수라장이다. 3월 말,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 브루클린의 부둣가. 수십 대의 냉동 컨테이너가 줄지어 서 있다. 그 안에는 코로나19 사망자의 시신이 쌓여 있다. 컨테이너에 임시 영안실을 마련한 것이다. 4월 중순, 뉴욕의 사망자는 7천 명을 넘어섰다. 뉴욕 브롱크스의 하트섬, 길게 판 여러 개의 무덤에 2열 종대로 20구씩의 시신을 집단 매장했다. 3월 말, 이탈리아 북부 도시 베르가모에서도 사망자가 폭증했다. 깜깜한 거리에 시신을 실은 군용트럭들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줄지어 가고 있는 기괴한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이런 장면들은 실시간으로 인터넷과 sns를 타고 전 세계에 퍼졌다.

현재, 세계는 한 마디로 공포와 광란의 아수라장이다.

한편,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의 한 교도소. 코로나19 감염 공포를 느낀 재소자들의 시위를 했다. 진압 과정에서 23명이 사망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식료품에 화장지까지 ‘패닉 구매’ 열풍이 불었다. 뉴욕의 대형 마트 곳곳에서 휴지를 사이에 두고 난투극을 벌였다. 하나도 사지 못한 여성이 카트 가득 휴지를 쌓아놓은 여성의 머리끄덩이를 잡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거리 곳곳에 총과 탄환을 사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지난 9월, 2.5단계 거리 두기가 완화된 첫 주말. 서울의 홍대 앞과 강남역 술집과 포차에는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10월 중순, 영국 리버풀의 시민들이 중심가를 가득 메운 채,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소리를 지르며, ‘봉쇄 전야 파티’를 벌였다. 11월 말, 뉴욕 시는 10명 이상의 실내 모임을 금지하는 강력한 행정명령을 내렸다. 이 와중에, 뉴욕 퀸즈의 한 클럽에서는 현란한 조명 아래, 80여 명의 남녀가 난교파티를 열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의료 기술도 위생 시설도 방역 시스템도 지금보다 그 수준이 훨씬 떨어졌던, 1940년대의 알제리의 항구 도시 오랑. 그곳에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와 너무도 흡사한 장면들이다.

고립 속에서 숨죽이며

8월이 지나면서 페스트는 선(線)페스트(임파선에 멍울 형태로 발병)에서 폐(肺)페스트(페스트균이 폐에 염증을 일으킴)로 발전했다.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면서 그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지역적으로도 인구밀도가 높고 환경이 열악한 외곽에서 도심으로 옮겨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당국에서는 특히 피해가 심한 구역을 격리시키고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한 외출을 금지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데서 위안을 얻었고, 해당 구역 사람들은 약자들을 학대하는 조치라며 항의했다.

그 무렵 오랑에는 공교롭게도 여러 날 동안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메마른 흙먼지 때문에 시민들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람들은 거리를 다니는 것도,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는 것도 두려워했다. 언제 어디서 누구로부터 전염이 될지, 또 누구에게 전염시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페스트는 특히 군대나 수도원, 형무소, 병원 등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여 있는 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했고, 그 후 차츰 차츰 일상 깊숙이 파고들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벼랑 끝에 선 듯 불안해진 시민들은 간헐적으로 약탈과 폭력 같은 돌발 행동을 했다. 당국에서는 어쩔 수 없이 페스트령을 계엄령과 동등하게 적용하기로 했다. 절도범 두 명을 사형시켰다. 하지만 수백 명이 죽어가는 판에 두 명쯤 총살당하는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급기야 페스트의 확산을 막기 위해 등화관제를 실시했다. 밤 11시 이후의 오랑 시는 무덤처럼 적막했다.

이 모든 조치에도 불구하고, 페스트는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렸고, 사람들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직장인들은 소심하고 눈에 띄지 않게 일을 했다. 직장이 없는 사람들은 최대한 외출을 자제하고 집안에 머물렀다. 마음은 여전히 정처가 없었다. 게다가 몸까지 멀어지니, 두려움과 함께 고립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달리 길이 없었다. 숨죽이며 납작 엎드린 채, 페스트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는.

2020년, 지금 우리가 처한 형편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코로나19는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확산세를 이어갔다. 언젠가부터 감염 경로를 알 수 없는 확진자가 주를 이루었다. 코로나가 일상을 파고들수록 재택근무와 비대면 수업으로 가족들은 모두 집안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각자의 방에서 업무를 보고 공부를 한다. 종일 방과 거실만을 오가는 그 답답하고 무거운 침묵 속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독신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공공장소가 문을 닫으면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집안에 틀어박힌 채 스마트폰만 종일토록 들여다본다. 배가 고파도 밥을 챙겨먹기도 귀찮아지고, 문득 이 세상에 혼자인 듯 불안과 외로움이 엄습한다. 노인들 역시 여느 때보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노인요양원은 올해부터 완전히 격리 상태에 들어갔다. 모든 면회가 중단됐다. 언제 끝날지 모를 이 상황이 답답하고 찾아와주지 않는 자식들이 야속하기만 하다.

지금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에서 숨죽이며 이 상황을 견디고 있는 중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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