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데카당스에게도 부정과 파괴에 대한 그들만의 명분은 있다. 그것은 모두 자유를 위해서라는. 그들은 항변한다. 전통이든 도덕이든, 이렇게 해야만 한다, 저렇게 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삶에 어떤 형식을 요구하는 것은 억압이다. 무언가를 금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삶을 속박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유를 원한다면, 그런 형식이나 금기 따위는 던져 버려야 한다.
자유를 향한 몸부림, 모든 형식과 금지에 대한 거부. 그럴싸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역시 사이비 자유! 한 번만, 찬찬히, 생각해보자. 삶의 어떤 형식을 요구받는다면, 그 삶은 곧 억압당하는 것일까. 금지는 그 자체로 자유를 가로막는 족쇄인 걸까. ‘어떤’ 형식, ‘어떤’ 금지인지에 상관없이?
우리가 존재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돌아보자. 제한 없는 삶은 없다. 삶이란 어떤 면에서든 제한이 있는 법이고, 특정한 형식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왜냐고? 우리는 유한하니까! 우리 몸을 보라. 몸에는 그 형상을 이루는 경계가 있다. 그런 제한이 몸을 유지시키며 우리를 외부와 구별되는 존재로 만든다.
일상의 삶 또한 언제나 특정 조건들 위에 서 있다. 낮이라는 테두리, 밤이라는 테두리, 혹은 집이라는 경계, 학교라는 경계, 혹은 식사를 하는 시간, 운동을 하는 시간 등등. 우리는 한정된 시공간을 통해 살아가며, 하나의 형식을 갖고 존재한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게 되어 있다. 아니, 그렇게만 살아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