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이 군주는 이렇게 맨날천날 끙끙 앓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일까? 정질의 육오 군주가 지닌 미덕은 항불사(恒不死), 항상 앓지만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병을 품은 삶을 감내하는 육오의 미덕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결론을 낼 수 있겠지만, 뇌지예의 전체 맥락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뇌지예 괘는 땅(地) 위에 천둥(雷)이 울려퍼지는 모습인데, 천둥은 하늘의 목소리 혹은 메시지를 상징하고, 땅은 그 목소리를 듣고 기쁘게 순종한다. 이렇게 위아래가 착착 스텝이 맞아 들어가기 때문에 예괘는 기쁨을 나타낸다. 이 기쁠 예(豫)자가 독특한 것이, 기뻐하다는 뜻과 함께 “미리”라는 뜻 또한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미리 방비하는 것, 선수 쳐서 미리 뭔가를 한다는 행동을 나타내는데 상당히 흥미롭다. 단순히 동음이의어로 연결된 우연한 조합이 아니라 미리 예비한다는 것과 기쁨이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촉이 온다. 이 두 가지를 연결한다면 오랜 병을 앓는 이들이 얻는 기쁨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가지고 있던 정질은 무엇을 미리 준비하게 했을까? 아무리 아파도 죽지 않는 군주는 어떻게 기뻐할 수 있으려나?
오롯이 고통만을 줬다고 생각했던 여드름이 내게 안겨준 색다른 인연이 하나 떠오른다. 해외에서 인턴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나는 다른 삶의 길을 모색하며 새로운 세상을 접하고 싶다는 야망에 부풀어 올랐던 청년이었지만, 여전히 피부에 대한 자신 없음과 남들이 혹시 불쾌감을 느낄까 전전긍긍하는 태도를 완전히 떨치기는 어려웠다. 먼 이국땅에 도착한 첫날, 낯을 많이 가리고 말도 별로 없던 내게 어떤 언니가 먼저 다가왔다. 언니가 내게 던진 말은 이랬다. “나 여드름 짜는 거 완전 좋아하는데… 혹시 괜찮다면 내가 짜 줘도 될까?” 이게 무슨…? 나는 벙쪄서 그 언니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렇지만 언니는 진심이었다. 그 날 나는 흥분한(?) 언니의 손길에 내 얼굴을 맡겼고, 언니는 신나게 고름을 짜고 약을 발라주고 패치를 붙여줬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내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엄청 웃고 많은 수다를 떨었던 날이었다. 여드름을 소재 삼아 웃을 수 있다니. 알고 보니 그 언니 또한 앓고 있던 정질이 있었다. 그건 바로 한 달에 한 번씩 거의 기절 수준의 통증을 동반하는 생리통! 이후로 언니는 종종 무료한 저녁 시간에 나를 무릎에 뉘어놓고 정성스레 여드름을 짜주었고, 나 또한 언니가 주기적으로 몸져누울 때마다 잔심부름과 보살핌으로 머리맡을 지키며 서로를 돌보고 우정을 쌓아나갔다. 미친 호르몬의 날뜀에 올라탄 승강(乘剛)의 청춘들이란!
그 언니와 함께했던 나날들은 ‘나만 왜 하필 아플까?’하는 억울함을 ‘우리는 모두 아픈 데가 하나씩은 있구나’하는 앎으로 변환시키게끔 만들었다. 이 지독한 정질이 비로소 색다르게 다가오는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모든 이들이 정말 다양한 양태로 하나씩은 품고 있을 법한 것이 이 정질(貞疾)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앓고 있는 이 정질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나를 막는 혐오스러운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거쳐 갈 많은 인연들에게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도록 미리 내게 주어진 어떤 공통 감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병과 몸에 대한 이야기만큼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것도,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것도 드물다. 병을 앓는 예괘의 군주가 경험할 수 있는 소박하고 잔잔한 기쁨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일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