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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으로 보는 세상이야기] 우리 삶에서 마주하는 괴로움(苦)의 모습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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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01-06 02:25 조회1,8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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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서 마주하는 괴로움(苦)의 모습들 (1)

장현숙(감이당 금요대중지성)

반려견과의 기억

나는 내가 좋은 사람인 줄 알았다. 딱히 누구에게 크게 해를 끼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연히 벌레 한 마리 죽이는 것도 내내 마음에 걸려 한다. 화를 내 본 적은 있지만, 딱히 누구를 치열하게 미워하거나 원망한 적도 없다. 가끔 누구를 원망하는 마음이 불쑥 올라올 때조차 그 사람의 입장이 이해되는 마음이 같이 작동해 마음껏 미워하지도 못한다. 감정이 들쑥날쑥 흐를 때는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스스로 조절하며 지나간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 모르지만, 어떻게 구분하든 나쁜 사람 쪽은 절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했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것이 아닌 줄 알게 된 치명적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강아지를 키운 적이 있다. 시츄 종으로 작고 귀여웠다. 큰아이가 저금통을 털어, 매번 오고 가던 골목길 애견샵에서 어미 개가 새끼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입양하자고 졸랐다. 집에서 반려견을 키운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고 귀여운 모습에 반해 덜컥 데려왔다. 이제 갓 젖을 뗀 강아지였다. 이름을 ‘루피’로 지었다. 처음에는 마냥 예쁘고 좋았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우리가 외출만하고 돌아오면 이불에 바닥에 똥오줌을 싸놓는다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은 외출하고 돌아오면 제일 먼저 이불이며 집 구석구석에 싸놓은 똥오줌을 치웠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치우다 보니 어느 날부터 부아가 나기 시작했다. 장마철 눅눅한 데다 이불빨래까지 하다 보면 루피가 고의적으로 대소변을 집에 뿌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버릇을 고쳐놔야지 하며 혼을 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리를 지르는 정도였는데, 어느새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손을 대는 강도가 점점 세졌다. 털이 있으니 덜 아플 것이고 덜 아프면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를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그렇게 폭력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내 목소리가 높아지자 루피는 베란다로 숨어버렸고, 난 쫓아가며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버릇을 고쳐놓겠다며 손을 들었다. 그때 베란다 구석에서 공포에 질린 루피의 눈과 마주쳤다. 덜덜 떠는 몸과 마주쳤고, 그를 향해 힘을 다해 내리치려는 내 손과 마주쳤다. 짧은 한순간이었는데 정지된 화면처럼 모든 동작이 멈춰버렸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거지? 말 못 하고 나약한 생명체를 상대로 내가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덜덜 떨고 있는 루피의 모습에도 악다구니하며 내리치려는 내 모습에도 울컥 눈물이 났다. 너무 부끄러웠고 너무 미안했다.

그 후 다시는 그런 일은 없었지만, 그 순간 우리의 모습은 아직도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때 알았다. 난 언제든 조건이 맞으면 폭력적으로 될 수도 있는 인간이었구나 하고. 내가 그동안 좋은 사람인 척 살 수 있었던 건 아직 그만한 조건을 만나지 않았을 뿐이라는 걸.

제6의식의 마음작용(心所)

내가 루피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기 눈앞에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일어났을 때, 상대를 때리거나 발로 차거나 소리를 지르며 분노하는 것을 유식에서는 ‘분(忿)’이라고 한다. ‘분’은 분노를 의미하는데, 그냥 마음으로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입(口)과 몸(身) 등의 구체적인 신체 행위까지 함께 하는 것이다. 분(忿)은 제6 의식의 마음작용(心所) 중 하나이다.

모든 식은 구체적인 마음작용(心所)과 함께 한다. 아뢰야식이든, 말나식이든, 의식이든, 전오식이든 식 자체(心王)만으론 그것이 있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나뭇가지가 흔들리거나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바람이 있음을 아는 것처럼 식도 작용이 있어야 그것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제6 의식은 51가지의 마음작용과 함께한다. 즉, 아뢰야식으로부터 제6 의식이 현현할 땐 51가지 마음작용 중 어느 하나(또는 여럿)도 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전오식은 아뢰야식의 분별의 종자에 연(緣)하여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할 수 있는 세계를 현현하고, 제6 의식은 그 세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象)’인지, ‘무엇’이라는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그 무엇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는 등 여러 마음작용으로 현현하는데, 이 마음작용이 51가지라는 것. 앞 사례의 경우, 루피가 싸놓은 똥오줌의 형상을 보는 것, 그 똥오줌의 냄새를 맡는 것, 똥오줌을 치울 때의 감촉, 개의 소리 등은 내 신체 기관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는 것으로 전오식의 작용이다. 전오식은 외부 대상과 만나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으로만 그것을 구분하여 인식한다. 전오식이 인식한 것을 바탕으로 ‘개의 똥오줌’, ‘똥냄새’, ‘더럽다’, ‘또 치워야 하네’, ‘저놈의 자식’, ‘다시는 못 하도록 버릇을 고쳐야지’하는 마음이 현현되는 것은 제6 의식의 작용이다.

제6 의식의 51가지 마음작용은 변행(遍行)이라는 마음작용이 5가지, 별경(別境)이라는 마음작용이 5가지, 선(善)이라는 마음작용이 11가지, 번뇌(煩惱)라는 마음작용이 6가지, 수번뇌(隨煩惱)라는 마음작용이 20가지, 부정(不定)이라는 마음작용이 4가지이다. 내가 루피에게 소리 지르고 때리며 화를 낸 분(忿)은 이중 수번뇌에 해당한다. 번뇌는 “자신의 마음을 번거롭고, 귀찮게 하며, 괴롭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마음의 움직임”(『유식삼십송과 유식불교』 참조)인데, 수번뇌는 이 번뇌가 더 구체적인 양상, 예를 들어 폭언, 폭력, 미움, 질투 등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번뇌가 일어날 때, 괴롭다

제6 의식의 마음작용은 몸을 매개로 하여 우리에게 괴로움을 경험하게 한다. 제6 의식의 마음작용들이 아무런 몸의 느낌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우린 어떤 마음을 일으키든 괴롭지 않을 수도 있다. 분노? 화를 내면 그만이지 내가 괴로울 것이 뭐가 있는가? 미움? 그것도 마찬가지다. 이 마음들이 아무런 몸의 느낌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세생생 화를 내거나 누구를 미워해도 괴롭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제6 의식의 모든(皆) 마음작용에는 몸의 느낌(受)도 함께 동반한다는 것이다. 제6 의식이 어떤 마음을 내든 내 몸도 그것과 함께 반응한다는 것. “뇌에서 신체적 통증을 전달하는 부위가 사회적 거부의 고통을 전달하는 부위와 같”고, “타이레놀을 장기간 복용하면 사회적 거부의 통증이 무뎌진다는 연구 결과”(『불교는 왜 진실인가』 참조)는 우리 마음의 작용이 마음으로만 끝나지 않고 신체(몸)의 느낌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는 불에 데이거나 칼에 베이는 것과 같은 신체적 고통만이 괴로움이 아니고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이와 같은 괴로움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식에서는 제6 의식이 현현할 때 일어나는 몸의 느낌에는 괴로운 느낌(苦受), 즐거운 느낌(樂受),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느낌(捨受) 세 가지가 있다. 이 중 괴로운 느낌은 번뇌와 수번뇌의 마음작용과 함께한다. 즉 “자신의 마음을 번거롭고, 귀찮게 하며, 괴롭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마음의 움직임”인 번뇌에는 반드시 몸의 괴로운 느낌도 함께 동반한다는 것. 이중 분(忿)은 번뇌가 더 구체적으로 표현된 마음작용이니, 당연 괴로운 느낌과 함께 한다. 이 말인즉 내가 루피에게 분한 표현을 할 때마다 내 몸도 마음과 함께 괴로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분은 분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분노하는 것이 오래되면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을 ‘한(恨)’이라고 한다. 루피에 대한 감정이 그랬다. 처음엔 여기저기 똥오줌을 싸놓으니 그 행위 자체에 화를 내다가, 나중에는 ‘이놈이 나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 아냐?’면서 미워하게 되었다. 한(恨)도 수번뇌의 마음작용 중 하나이니, 역시 몸과 마음의 괴로운 느낌(苦受)과 함께 일어난다. 그런데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은 단순히 밉다는 마음만으론 유지되지 않는다. 나의 잘못을 잊어버리거나 덮어버리는 마음과 함께 일어난다. 내 잘못은 덮어버리고 상대의 잘못된 점을 부각시켜야 미움이 유지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실 강아지가 뭘 알겠는가. 그렇게 된 데에는 내가 제대로 교육을 시키지 못한 이유가 크다. 갓 젖을 뗀 애를 데려와 놓곤 언제 대소변을 가릴 수 있는지, 어떻게 가릴 수 있는지 등 그 원리를 알지 못한 채 내 마음대로 되기를 원했다. 그런데 내 행위에 대한 잘못은 덮어버리고 루피가 얼마나 머리 나쁘고 말을 안 듣는가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를 ‘복(覆)’이라고 한다. 자신의 잘못을 숨기고자 하는 마음작용이다. 자신의 잘못은 상대를 나쁘게 만들면서 감추어지는 법. 복(覆)도 수번뇌의 마음작용 중 하나이다. 역시 몸과 마음의 괴로운 느낌(苦受)과 함께 일어난다. 나의 잘못을 숨기고자 하는 마음은 내 잘못을 들키지 않기 위해 상대에 대해 더욱 거친 말을 하며 몰아붙이는 행위와 함께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를 ‘뇌(惱)’라고 한다. 몹시 사납게 다투고 난폭한 말을 하는 마음작용이다. 이 역시 수번뇌이고, 몸과 마음의 괴로운 느낌과 함께 일어난다.

이처럼 내가 루피를 대했던 하나하나의 장면엔 모두 제6 의식의 수번뇌의 마음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작용이 있을 때마다 나는 괴로웠다. 생각해보면 달리 누가 괴롭게 해서가 아니라 그 상황에서 그 마음을 내는 것 그 자체가 괴로움을 만든 것이다. 우리는 상대가 또는 상황이 나를 괴롭게 한다고 한다. 그것도 어느 정도 맞다. 그런데 그 상대에게, 그 상황에서 그 마음을 내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 똑같은 상대에게, 똑같은 상황에서 누구든 똑같은 마음을 내는가? 그러니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은 어쩌면 외부 대상(조건)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일 수 있다.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장면에는 수많은 마음이 함께 작용한다. 평범하고도 심심한 장면 하나에도 아뢰야식의 종자, 말나식의 사량의 마음, 전오식의 색,성,향,미,촉, 제6 의식의 ‘무엇’이라는 감각의 해석과 함께 여러 마음작용들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우리의 마음은 외부 대상이 변할 때마다 또는 변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바쁘다. 내가 알든 모르든 몸의 느낌은 마음과 함께하고 그 마음이 번뇌에 싸여 있을 때 우리는 이 바쁜 와중에도 늘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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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다음 연재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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