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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으로 보는 세상이야기] 우리 삶에서 마주하는 괴로움(苦)의 모습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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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01-23 07:52 조회1,7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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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서 마주하는 괴로움(苦)의 모습들 (2)

장현숙(감이당 금요대중지성)

종자의 현행, 삶

제6 의식은 51가지의 마음작용 중 하나 또는 여럿을 현실의 삶 속에 늘 현현시키고 있다. 이 마음작용들의 드러남과 사라짐이 우리의 삶이다. 무상천, 무심정, 멸진정(수행해서 얻을 수 있는 경지들)이나 잠잘 때 또는 기절했을 때에만 잠시 사라질 뿐 살아있는 한 언제나 현현되는 식이다. 그러니 제6 의식이 어떤 마음으로 현현하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모습도 다르다. 늘 번뇌나 수번뇌의 마음으로 현현되고 있다면 우리 삶도 늘 괴롭다는 것이다.

제6 의식은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라는 원인(因)과 외부 대상(현상)이라는 연(緣)이 작용하여 현실에 현현된다. 꽃은 씨앗만으로도 필 수 없고, 땅과 햇빛, 물만으로도 필 수 없다. 꽃씨라는 인(因)이 땅과 햇빛 그리고 물이라는 연(緣)을 만났을 때 꽃이 필 수 있다. 이와 같이 현실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마음도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와 그 종자를 현행하도록 하는 현실의 연에 따라 다르게 현현될 수 있다(種子生現行). 똑같은 상황에서 누구나 똑같은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은, 꽃의 예로 보면, 땅과 햇빛 그리고 물이라는 외부 조건은 같지만, 각자가 아뢰야식에 저장하고 있는 마음의 종자는 다르기 때문이다.

아뢰야식은 현실(현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뢰야식이 전오식, 제6의식, 말나식으로 전식(轉識)하고 있는 그 자체가 현실이다)의 삶에서 몸으로 행한 것(身業), 말로 행한 것(口業) 그리고 분별의 뜻으로 행한(意業) 모든 것을 훈습하여 종자로 저장한다(現行熏種子). 훈습이란 되풀이하며 행한 행위의 경향성이 마치 향냄새가 옷에 베이듯이 아뢰야식에 저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은 현실에서 행한 모든 업이 저장되어 있는 업식(業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뢰야식엔 이런 업들이 찰나에서 찰나로 흐르며 저장되어 있는데(種子生種子), 이렇게 종자들이 연결된 듯 끊어진 듯 찰나찰나 이어져 가는 모습을 폭우가 내린 후 성난 강물이 그 흐름을 연결해가며 흐르는 모습에 비유하기도 한다.(恒轉如暴流). 거친 물의 흐름처럼 흐르던 종자는 외부 대상(현상)이라는 연(緣)을 만나면 말나식, 제6 의식, 전오식을 현현하며 종자에 맞는 현실을 현행시킨다.

그런데 신,구,의로 지은 업이 선(善)하냐 불선(不善)하냐에 따라 아뢰야식의 종자의 경향성도 달라진다. 선한 업을 많이 지으면 아뢰야식의 종자도 선의 행위를 현행시킬 경향성(이하, ‘선종자’라 함)을 띠고, 불선한 업을 많이 지으면 아뢰야식의 종자도 불선의 행위를 현행시킬 경향성(이하, ‘불선종자’라 함)을 띨 수밖에 없다. (아뢰야식 자체는 선도 불선도 아니다) 아뢰야식의 종자는 현실의 삶을 현현시키는 원인(因)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종자가 어떤 행위를 현행시킬 경향성을 띠고 있느냐는 현실의 삶이 어떻게 나타나느냐와 관련이 깊다. 크게는, 육도윤회(六道輪回) 시, 천상, 인간, 아수라 등 중 어떤 세상으로 태어나느냐와 관련이 있고, 작게는, 인간계(界)에 살면서도 어떤 현실을 사느냐와 관련이 깊다.

삶의 모습 그 자체에는 행복(樂)도 괴로움(苦)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사실이 있다. 선종자가 현행하는 삶의 모습과 불선종자가 현행하는 삶의 모습은 어떻게 다를까? 우리는 선종자에 의해 현행되는 삶의 모습으로 돈이 많은 부자, 남들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권력가, 잘생긴 외모, 근육이 탄탄한 건강한 몸 등을, 불선종자에 의해 현행되는 삶의 모습으로는 가난, 남들이 알아주지 않음, 못생긴 외모나 건강하지 않는 몸 등의 외형적인 것들을 떠올린다. 그런데 유식은 아뢰야식의 선종자는 즐거운 느낌(樂受)의 전오식과 제6의식을 현행시키고, 불선종자는 괴로운 느낌(苦受)의 전오식과 제6의식을 현행시킨다고 한다(皆三受相應). 이 말이 무슨 의미인가? 아뢰야식에 선종자가 많은 사람은 전오식과 제6 의식이 현행할 때 즐거운 느낌(樂受)으로 외부 대상(상황)을 대하는 경향성이 있고, 불선종자가 많은 사람은 전오식과 제6 의식이 현행할 때 괴로운 느낌(苦受)으로 상황을 대하는 경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잘살고 못살고, 권력이 있고 없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건강하고 안 하고의 외형적 조건이 아니라 어떤 느낌(苦樂捨)으로 세상을 대하느냐가 선과 불선한 업의 결과라는 것.

이 말을 잘 생각해보면 그동안 이해되지 않던 많은 것들이 이해된다. 나쁜 놈들은 잘살면서도 왜 늘 목마른가? 좋은 사람은 맨날 당하면서도 어떻게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 참 이해 안 되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유식에 의하면 간단하다. 영혼을 끌어올려 친구까지 배신하며 잘살려고 하지만 부유하게 사는 모습 그 자체에는 행복이 없다는 말이다. 남들에게 거짓말해가며 권력을 쟁취하지만, 권력 그 자체에도 행복이 없다는 것. 그리고 건강한 모습, 잘생긴 모습, 오래 사는 모습 그 자체에도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삶의 모습 자체에는 행복도 괴로움도 없다는 것이다. 삶의 모습 그 자체가 아니라 주어진 삶을 어떤 느낌으로 대할 수 있느냐가 선업과 불선업의 결과라는 것. 물론 즐거운 느낌이 현행하려면 삶의 외부적 조건이 너무 열악하면 안 되므로 어느 정도 평안한 현실적 조건은 갖출 수 있다. 그렇지만 그 현실적 조건 자체에 행복 또는 괴로움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유식에 의하면, 행복은 아뢰야식의 선의 경향성, 즉 선종자에서 온다. 선의 경향성은 외부 조건이 어떠하든 그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그러나 완전히 구애받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몸을 입고 태어났으니 환경이 주는 영향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즐거운 느낌(樂受)을 현행시킨다. 이때 아뢰야식의 선종자에 의해 현행되는 즐거운 느낌(樂受)은 외부 대상에 의해 좌우되는 감각적 즐거움과는 다르다. 맛있는 음식, 화려한 외형에 대한 끌림, 약물에의 도취, 성적 결합 등과 같이 외부 대상에 의해 일어나는 감각적 즐거움은 쾌락이라고 하는데, 이는 대상에 따라 표류하듯 생겨났다 사라지는 허망한 즐거움이다. 그런데 아뢰야식의 선의 경향성에서 일어나는 즐거운 느낌은 대상에 의해 표류하지 않는 내면 깊은 곳에서 비롯되는 즐거움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괴로움도 아뢰야식의 불선의 경향성, 즉 불선종자에서 온다. 아뢰야식에 불선종자가 많으면 전오식과 제6의식으로 현행하는 마음은 늘 괴로운 느낌을 동반한다. 즉 남들이 보기엔 좋아 보이고 행복해 보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번뇌와 수번뇌의 마음으로 스스로 괴롭게 하며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선(善)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불교 경전을 읽다보면, ‘선남자’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선남자는 착한 남자라는 뜻인가? 보통 착한 행위, 착한 마음을 ‘선’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착하다(善)’는 것은 무엇일까? “선(善)이란 이 세상(此世)과 저 세상(彼世)에서 이익을 주는 마음이나 행위”(『유식삼십송과 유식불교』 참조)를 의미한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은 시간적으론 ‘지금도 다음에도’, 공간적으론 ‘여기도 저기에도’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금도 이익이 되고 다음에도 이익이 되는, 여기도 이익이 되고 저기에도 이익이 되는 마음이나 행위가 선이라는 것. 참 애매하다. 세속적 기준으론 쉽게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 이익이 되는 것이 다음에도 이익이 되려면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하나? 여기도 이익이 되고 저기에도 이익이 되는 것은 또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하나? 그래서 세속적으로 선을 생각하면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누구를 돕는 행위조차 지금은 그 사람에게 이익이 되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불이익이 되는 경우가 있고, 여기서는 남에게 이익을 주는 행위가 저기에서는 다르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행위는 상황에 따라 늘 다르게 평가되지 않는가. 하물며 이 세상에서도 저세상에서도 이익을 주는 마음이나 행위라니. 그런데 정화스님은 선을 “우리 삶을 공, 무상, 무아 속으로 흘러가게 만드는 마음작용”(『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p154 참조)이라고 한다. 공, 무상, 무아. 한마디로 빈 마음의 작용이 선이라는 것이다. 빈 마음은 분별이 없는 마음이다. 분별이 있다는 것은 마음에 고정된 기준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기준들이 있으면 여기서는 이익이 되는 어떤 행위가 저기에 가면 이익이 되지 않기도 하고, 이 세상에서는 이익이 되는 어떤 행위가 저 세상에서는 이익이 되지 않기도 한다.

분별, 우리 삶의 괴로움의 모습들

내 속(아뢰야식)엔 번뇌를 일으키는 불선종자가 많을지도 모른다. 아니 많다. 세상을 이것과 저것으로 가르는 수많은 분별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내(我)’가 있다는 생각과 그 나에 상대하는 ‘대상(法)’이 있다는 분별이다. 이 분별을 기본으로 좋음과 나쁨, 높음과 낮음, 이익과 손해, 잘남과 못남, 이 사람과 저 사람, 이것과 저것 등 수많은 분별들이 파생된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이 ‘나’보다 뛰어나면 영락없이 질투하는 마음(질(嫉))이 올라오고, ‘내’가 가진 것을 ‘누군가’와 나누려고 하면 아깝다는 마음이 불쑥 올라온다(간(慳)). 그러면서도 ‘남’들에게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인 양 보이고 싶어 한다(광(誑)). 가끔 ‘나’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내 삶의 방향성을 왜곡해가면서 ‘타인’에게 아첨하기도 하고(첨(諂)), ‘나’의 안위를 보존하기 위해서 ‘타인’에게 해로움을 끼칠 수도 있다(해(害)). 그리고 ‘나’의 재능, 능력, 건강 등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기를 늘 바란다(교(憍)).

그러니 루피와의 일(앞 연재 글 참조)에서 겪은 분, 한, 복, 뇌라는 수번뇌 외에도, 내 생활 전반에 현행하는 제6 의식은 번뇌의 마음이다. 번뇌는 늘 괴로운 느낌(苦受)을 동반하고, 제6 의식은 무상천, 무심정, 멸진정이나 잠잘 때 또는 기절했을 때에만 잠시 사라질 뿐 살아있는 한 언제나 현행한다고 하니, 나는 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던 늘 괴로움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어느 명상센터에서 깨달은 괴로움의 정체였다. (‘괴로움(苦), 그것을 안다는 것!’ 연재 글 참조) 그런데 이렇게 사는 모습은 비록 나만의 모습이 아니라 아뢰야식에 불선종자, 즉 분별의 종자가 있는 수많은 중생들이 사는 모습이기도 하다. 매순간 자신들에게서 올라오고 있는 마음의 모습을 보라. 어떠한가?

제6 의식의 마음작용 중 번뇌와 수번뇌의 마음작용은 이 괴로움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탐(貪), 진(瞋), 치(癡), 만(慢), 의(疑), 악견(惡見)인 번뇌와, 분(忿), 한(恨), 복(覆), 뇌(惱), 질(嫉), 간(慳), 무참(無慙), 무괴(無愧), 도거(掉擧), 혼침(昏沈), 불신(不信), 해태(懈怠), 방일(放逸), 실념(失念), 산란(散亂), 부정지(不正知)인 수번뇌는 모두 사성제(四聖諦)에서 ‘이것이 괴로움이다(苦諦)’할 때, 그 괴로움의 구제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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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자신이 마음을 일으킨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우리 마음은 종자의 인(因)과 조건의 연(緣)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 분별의 종자(불선종자)가 많으면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늘 괴롭다. 세상 모든 일이 이 괴로움을 일으키는 연(緣)으로 작동할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괴로움의 모습들이다. 여기서 어떻게 해방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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