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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와 페스트] 페스트의 생로병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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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02-11 13:21 조회1,2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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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의 생로병사 (2)








 
복희씨 (감이당)

절정에서 향연을

페스트의 기세등등한 불꽃은 화장터의 화덕에서 매일같이 더 신바람이 나서 타고 있었다. 사실 날마다 사망자 수가 증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페스트는 이제 그 정점에서 편안히 자리잡고 앉아서, 착실한 관리처럼 매일매일의 살인에서 정확성과 규칙성을 과시했다. (알베르 까뮈, 『페스트』, 책세상, 2017, 315쪽)

줄곧 상승세를 이어오던 페스트는 정점에서 수개월 동안 여유롭게 그 세력을 과시했다. 이 정도의 전성기를 누리려면 소위 말하는 연때가 맞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페스트는 무척 운이 좋은 셈이다. 밤낮 없이 타오르는 화장터의 불꽃을 보며,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역한 냄새를 맡으며, 오랑 시민들은 바로 곁에 다가온 죽음의 공포에 압도당했다. 게다가 9,10월이 되도록 물러갈 줄 모르는 늦더위, 저녁이면 식당으로 클럽으로 몰려가는 사람들. 함께 먹고 마시고 쉴 새 없이 잡담하고, 몸과 몸을 부대끼며 서로의 체온을 느끼는 것 말고는 만족감과 안도감을 얻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집으로 돌아가 다시 혼자가 되면, 조금만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나도 ‘혹시?’ 하는 공포심에 휩싸인 채, 후회와 자책과 불안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는, 숙주들의 불안정한 정서 상태.

페스트의 기세등등한 불꽃은 화장터의 화덕에서 매일같이 더 신바람이 나서 타고 있었다.

거의 탈진 상태에 빠져, 자주 방역에 허점을 보이는가 하면, 어린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면서 극심한 무력감에 시달리는 의료진들. 더 이상 의사도 교회도 믿지 못하는 시민들. 위생이나 방역보다는 시중에 나도는 예언서나 부적 등에 마음을 맡긴 채 갈팡질팡하는 불신이 팽배한 사회분위기. 이 모든 것들이 페스트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새로운 혈청이 뜻하지 않게 성공을 거둔 몇 건의 사례가 있었고, 오랜 안정세는 쇠퇴로 이어진다는 경험치를 바탕으로 낙관론을 펼치는 전문가들의 주장이 힘을 받는 듯했다. 그러나 페스트가 물러갈 것이라는 낙관론이 퍼져나가기 시작할 즈음, 낙관론을 펼치던 리샤르가 갑작스레 페스트로 사망했다. 지금까지 페스트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지금도 여전히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또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가, 그것도 회장이 죽었다는 사실에 오랑 시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분위기는 다시 비관론으로 돌아섰다. 무엇에든 우열을 두는 인간들의 습성이란….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의 세상에 차별 같은 건 없다. 코로나19 역시 그 사람이 영국 총리건 미국의 대통령이건 개의치 않는다. 조건이 맞으면 어디든 파고든다. 다양한 조건들의 마주침 속에서 번성과 소멸의 리듬을 탈 뿐이다. 오직 우리 인간들만이 눈앞에 보이는 현상에 휘둘리며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살 길인지 죽을 길인지도 모르고 욕망에 이끌려 갈팡질팡 살고 있다.

이 모든 조건들의 환상적인 어우러짐 덕분에, 페스트는 오랑 시민들을 자기 발아래 꿇어앉혀 놓았다. 그리고 느긋한 기분으로 오래도록 절정에서 향연을 즐겼다.

화려한 불꽃, 쇠퇴의 조짐

비관론이 돌기 시작한 오랑 시. 이미 폐에서 활동을 시작한 페스티스가 점점 더 힘을 얻었다. 환자들은 각혈을 하며 더 빨리 죽어갔다. 비말과 공기로 전파속도가 빨라지면서 사망자가 급증할 거라는 예측이 나돌았다. 누적 환자 수가 증가하면서 오랑 시는 현청을 제외한 모든 공공기관을 검역소로 전환했다. 격리 수용소가 설치된 시립운동장에는 수백 개의 붉은 천막이 들어섰다. 페스트의 위세는 화려했다.

그러나 기존에 득세하던 선-페스트가 주춤해지면서 신규 페스트 환자 수에는 거의 변동이 없었다. 11월 하순이 되면서 아침 기온이 급강하했다. 거기에 억수 같은 비를 몇 차례 퍼붓더니 날씨는 더욱 맑고 싸늘해졌다. 최상의 환경을 제공하던 더위가 완전히 물러가면서 그간의 호시절에 빨간불이 켜졌다. 설상가상으로 시민들마저 의사들의 치료 행위에 협조하기 시작했다. 페스트 앞에서 잔뜩 쫄아 있던 시민들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제야 비로소 자신들에게 이로운 게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고, 차츰 중심을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페스트 앞에서 잔뜩 쫄아 있던 시민들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제야 비로소 자신들에게 이로운 게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고, 차츰 중심을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꼭 죽을 줄 알았던 환자들이 살아나는 사례가 4건이나 생겼다. 그 이후 그렇게도 당당하고 철두철미하게 오랑 시민들을 관리하던 페스트가 빈틈을 보이는 일이 잦아졌다. 사람들과 페스트 사이에 힘의 크로스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시민들은 이런 변화를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행여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장애가 있지 않을까 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느라 전체 흐름을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인식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고, 페스트는 이제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퇴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지난 일 년 간 코로나19 역시 부분적인 오르내림은 있었지만 큰 흐름상으로는 상승세를 이어왔다. 국내 상황도 연말, 일일 신규 확진자가 천 명을 넘어서면서 3차 대유행의 정점을 찍고, 새해 들어 다시 하강 국면으로 돌아섰다. 1월 중순부터 2월 초순인 현재까지 일일 신규 확진자가 300-400명대 선에 머무르고 있으며, 전 세계의 신규 확진자도 이 흐름과 비슷하다. 이것이 전반적인 퇴각의 신호인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 전문가들 중에는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변이바이러스의 활동으로 3,4월경에 4차 대유행이 올 것임을 경고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코로나19를 둘러싼 환경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코로나19에게 유리한, 차고 건조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고 있으며, 전 세계의 백신 접종자가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를 넘어섰다. 앞으로도 계속 늘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오는 심리적인 안정감까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던 인간들로서는 힘의 배치를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 기회를 살려서 코로나19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지는 미지수다. 다만 화려한 불꽃에 숨겨진 쇠퇴의 조짐을 읽어낼 수 있다면,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다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그 전환의 기로에 서 있는 게 아닐까.

‘갑작스런’ 소멸

페스트는 그 다음날로 당장 끝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겉보기에 의당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기대했던 것보다는 더 빨리 약화되어가고 있었다. (…) 병에 대응하는 전략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어제까지는 효과가 없었던 전략이 오늘은 뚜렷이 효과를 나타냈다. 다만 병이 제풀에 힘을 다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제 목적을 달성했으니까 물러가는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병은 소기의 임무를 다한 것이었다.(360쪽)

질병에서 해방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기대하는 것은 질병을 ‘퇴치’하는 것이다. 이때의 질병은 인간이 물리치면 꼼짝없이 물러가는 존재이다. 질병이 기승을 부리는 것은 인간의 기술이 아직 미약해서 그에 딱 맞는 치료 방법을 발견하지 못한 때문이다. 딱 맞는 기술이 개발되기만 하면 인간이 측정할 수 있는 수치의 변화를 보이면서 서서히 물러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페스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과정에서 그게 그렇게 예측대로 착착 진행되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 그러면서 그 반대의 절망이 시민들을 지배했다. 자신들이 그걸 퇴치하지 못하는 한 거기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그런데 1월 초순에 접어들면서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자 오랑의 대기는 더욱 맑아졌다. 늙은 의사 카스텔은 여전히 완치된 환자들의 혈장에서 항체를 뽑아 새로운 혈청을 만들었고, 새로운 환자들에게 투여했다. 시민들은 위생과 청결에 신경을 썼다.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퇴각의 흐름에 올라탄 페스트는 3주일 동안 연속적으로 내리막길을 달렸다. 별다른 치료법이 없었음에도 통계 수치가 계속적으로, 그것도 현저하게 낮아졌다.

당국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페스트가 종식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발표를 했다. 페스트의 ‘갑작스런’ 퇴각에 시민들은 긴가민가했다. 그러면서도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희망에 마음은 이미 조급해졌다. 페스트가 물러가는 과정에서도 ‘이성적’으로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안심하던 곳에서 감염을 일으켜 의료진들을 긴장시키는가 하면, 당국에서 예의주시하고 있는 곳에서는 홀연 자취를 감춰버려서 담당자들을 당황스럽게 했다. 페스트가 정점에 있을 때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특히 “페스트의 걸음걸이를 끝까지 따라갈 수가 없게 된”(362쪽) 사람들이 조바심에 못 이겨 서둘러댔다.

페스트의 걸음걸이! 그렇다. 세상만물은 모두 그 나름의 속도와 리듬을 갖는다. 저마다의 속도와 리듬으로 때로는 맞서기도 하고, 때로는 어울리기도 하고, 또 때로는 평행선을 그으며 그렇게 흘러간다. 질병도 예외일 리가 없다. 코로나19 역시 우리 인간들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조건들과 상호의존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우리와 함께 흘러가고 있다. 페스트는 그 어떤 미련도 없이 그 흐름을 따라 흘러간다. 그러나 그 걸음걸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인간에게 페스트의 소멸은 ‘갑작스러운’ 것이 되고 미처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서 우왕좌왕 길을 잃는다.

페스트의 걸음걸이! 그렇다. 세상만물은 모두 그 나름의 속도와 리듬을 갖는다. 저마다의 속도와 리듬으로 때로는 맞서기도 하고, 때로는 어울리기도 하고, 또 때로는 평행선을 그으며 그렇게 흘러간다. 질병도 예외일 리가 없다.

길흉은 없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길(吉)인가 흉(凶)인가. 사실 바이러스 자체가 우리의 생명에 직접 위해를 가하지는 않는다. 물론 바이러스가 침범하지 않았다면 문제가 발생할 건덕지가 없으니 그 탓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그렇다. 그러나 이미 우리 몸에는 수많은 미생물들이 살고 있고 그것들이 없다면 생명 유지 자체가 힘들다. 그리고 숨을 쉬고 있는 한 우리는 박테리아, 바이러스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이때 어떤 조건과 배치에서 이들이 우리 몸과 맞닥뜨리면 면역시스템이 이상 작동을 일으키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코로나19 이후 유독 많이 들어온 ‘사이토카인 폭풍’이 바로 그것이다. 사이토카인은 우리 몸에 낯선 침입자가 들어왔을 때 면역 시스템에 작동 개시를 알리는 사이렌 역할을 하는 물질이다. 이것이 지나치게 분비되면 방위병들이 오버액션을 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자기 몸이 해를 입게 된다. 코로나19도 사스코로나바이러스와 면역 세포들의 충돌 과정에서 발생한 병증이다. 그것이 병증으로 드러나느냐 아니냐는 그것이 어떤 관계, 어떤 배치 속에 놓이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누구는 무증상으로, 다른 누구는 사망에 이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길흉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사건이나 사물을 대하는 인간들의 심리적인 반응이다. 페스티스도 인간과 무관하게 그들의 서식지에서 살 때는 길도 흉도 아니었다. 인간의 정착지로 흘러오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지금 우리는 팬데믹이라는 재앙 앞에 서 있다.

우리의 삶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그 중에서도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사건에 우리는 재앙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그런 일이 닥칠 때마다 그 앞에 ‘미증유’라든가 ‘사상 초유’라는 수식어를 단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미증유의 사건이며 사상초유의 사태인 것은 사실이다. 어떤 나라도 예외 없이 이토록 광범위한 팬데믹은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니까.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이미 인류는 중세의 페스트도 겪었고 온갖 역병을 통과하며 여기까지 왔다. 그것이 전 세계적인 사건이 되지 않았던 것은 교통과 통신이 오늘날처럼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일 뿐, 당시로서는 그 역시 미증유의 재앙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었으니 흉하기로는 이보다 더한 일이 없다.

그러나 진실로 흉한 것은 변치 않는 우리들의 인식이다. 재앙은 언제나 우리의 삶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다가 어느 날 운 나쁘게 인간사로 훅 뛰어든다고 여기는 무지의 반복. 코로나19가 가고 나면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는 지난 시간들을 망각하고 부정하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려는 관성에 우리 삶을 맡길지도 모른다. 오랑 시민들이 페스트가 물러가고 봉쇄되었던 문이 열리자마자,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지난 일들을 까맣게 잊어버렸듯이.

그러나 단 한 가지, 세상만물은 상호의존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이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이번 재앙은 지극히 근시안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우리들의 삶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길함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세상만물은 상호의존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이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이번 재앙은 지극히 근시안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우리들의 삶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길함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페스트의 현장 한가운데서 성실 하나로 그 모든 과정을 겪어낸 서술자이자 의사인 리유, 그의 독백을 독자들과 함께 음미하며 페스트 연재를 마친다.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고 있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 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410쪽)

― 이상으로 '포스트 코로나와 페스트' 연재가 종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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