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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주역 2] 어둠에 물들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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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02-14 09:17 조회1,4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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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물들지 않기

성승현(감이당)

地火 明夷   

明夷 利艱貞.

명이괘는 어려움을 알고 올바름을 굳게 지키는 것이 이롭다.

初九 明夷于飛 垂其翼 君子于行 三日不食 有攸往 主人有言.

초구효, 밝은 빛이 손상당하는 때이니 나는 새의 날개가 아래로 처지는 것이다. 군자가 떠나가면서 3일 동안 먹지 않으니 나아갈 바를 두면 주변 사람들이 이런저런 말을 한다.

六二 明夷 夷于左股 用拯馬壯 吉.

육이효, 밝은 빛이 손상당하니 왼쪽 넓적다리를 다쳤으나 구원하는 말이 건장하다면 길하다.

九三 明夷于南狩 得其大首 不可疾貞.

구삼효, 밝은 빛이 손상당하는 때에 남쪽으로 사냥 나가서 그 우두머리를 얻지만 빨리 바로 잡을 수는 없다.

六四 入于左腹 獲明夷之心 于出門庭.

육사효, 왼쪽 배로 들어가 밝은 빛을 손상당한 육오의 마음을 얻어서 문 앞의 뜰로 나오는 것이다.

六五 箕子之明夷 利貞.

육오효, 기자가 밝은 빛을 감춘 것이니 올바름을 지키는 것이 이롭다.

上六 不明晦 初登于天 後入于地.

상육효, 밝지 못하여 어두우니 처음에는 하늘에 오르고 나중에는 땅속으로 들어간다.

 

요즘 아침이 분주하다. 일어나면 뉴스부터 체크하는데, 뉴스를 그대로 신뢰할 수만은 없어서다. 각종 매체와 온라인 사이트에 들어가 팩트를 체크하느라 오전 시간이 훅 날아간다.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 매년 40여 개 국가를 대상으로 언론 신뢰도를 조사하는데, 「디지털 뉴스 리포터」에 따르면 한국의 언론 신뢰도는 몇 년째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기자들이 기사를 쓰는 대신 ‘받아쓰기를 한다’, ‘복사해서 붙인다’는 이야기는 상식처럼 되어버렸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언론개혁이 최대의 화두로 떠올랐다. 이처럼 언론은 불신의 대상, 단죄의 대상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런데, 이것이 기성언론만의 문제일까? 요즘처럼 뉴스를 다양한 방식으로 접할 수 있는 시대도 없었다. 개인이 취재해서 만드는 유튜브 방송이 있는가 하면, 카카오톡,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를 이용한 뉴스도 확대되고 있다. 이 미디어들은 소수언론의 기능을 하며 진실을 바로잡으려 하지만, 문제는 검증 과정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짜뉴스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작정하고 가짜뉴스를 쏟아내는 경우도 있다.

신문사진

이와 같은 언론의 문제는 언론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나는 오래 전부터 기사와 댓글을 함께 읽어왔다. 현실을 대하는 대중의 마음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댓글은 세상을 읽는 창구이기도 하니까. 그러다 보니 요즘 댓글의 분위기가 달라진 게 느껴진다. 놀랄 정도로 그 수위가 높아졌다. 문재앙, 대깨문, 국쌍, MB 아바타 등 인물을 희화화하는 것은 기본이고, 저주와 조롱, 폭언이 난무하다. 댓글만 보고 있으면 세상 사람들이 분노에 가득 차서 무슨 일을 낼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물론,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는 이도 있고, 팩트를 체크해 주는 이도 있다. 그럼에도 부정적이고 감정적인 댓글이 점점 확대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지화명이괘가 언론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밝은 빛이 땅 속으로 들어간 것(明入地中)이 명이괘의 모습인데, 진실이라는 ‘밝음’이 가짜뉴스나 댓글부대가 만들어내는 ‘어둠’에 가려지고 있는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다. 명이의 시대에 군자는 빛이 땅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어둠을 써서 밝게 한다’는 ‘용회이명(用晦而明)’의 지혜를 생각해냈다. 이는 자신의 현명함을 내세워 시시콜콜 살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둠에 대해 시시콜콜 따지다 보면 군자 자신이 분함과 질시를 이기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관대하고 포용하는 덕이 없어져 지혜롭지 못하게 되어버리기 때문(정이천, 『주역』, 글항아리, 718쪽)이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어둠의 면면에 집중하다 보면 시비를 가리는 데 에너지를 쓰게 될 것이고, 정작 이에 대응할 지혜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지화명이괘는 아래를 문명함으로, 위를 유순함으로 볼 수도 있다. 문명한 덕을 지니고 있지만, 그 문명함을 시비를 가리고 선악을 재단하는 데 쓰지 않는 것이다. 겉으로는 유순한 태도를 보이면서 동시에 안으로는 지혜를 보존하는 것인데, ‘용회이명’의 태도가 바로 이와 같다.

댓글그럼에도 부정적이고 감정적인 댓글이 점점 확대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나는 ‘용회이명’의 지혜를 가장 실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효로 ‘구삼효’를 주목했다. 구삼효는 ‘밝은 빛이 손상될 때 남쪽으로 사냥을 가서 우두머리를 얻지만(明夷于南狩 得其大首) 빨리 바로 잡을 수는 없다(不可疾貞)’고 풀이한다. 어둠의 주체인 우두머리를 제거한다고 해도 이미 물들어버린 관습과 흔적은 남아서 여전히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서둘러서는 안 된다. 『서경』 「주고」에서 비슷한 상황을 보여준다. 폭군의 대명사로 꼽히는 주왕(紂王)은 폭정으로 은나라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주지육림(술이 연못을 이루고 고기가 숲을 이룬다), 포락지형(불에 달군 쇠로 단근질하는 형벌) 등의 말도 주왕에게서 나왔다. 결국, 주왕은 은나라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세상을 어지럽혔던 우두머리가 잡힌 셈이다. 하지만 「주고」를 보면, 당시 주왕이 죽고도 백성들 사이에 퍼져버린 술 문화가 고쳐지지 않아 골치를 앓았음을 알 수 있다. 술은 일상을 망치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주범이기도 했다. 주공은 이를 단번에 고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렇기에 예법이나 문화, 제도를 통해 서서히 개선하려는 노력을 했다. 「주고」에는 주왕의 정치에서 비롯된 폐단을 차근차근 고쳐 나가려 하는 주공의 지혜가 담겨 있다.

지금의 언론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신뢰를 잃은 언론, 쏟아지는 가짜뉴스, 댓글에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배설하는 사람들… 이 어둠을 만들어내는 주체를 없애기 위한 다양한 사냥법이 나오고 있다. 최근에는 왜곡보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에 대한 법안이 발의되었고, 연예 부분에 제한했던 댓글 규제를 포털 전체로 확대하는 법안이 검토되고 있다. 이같은 법안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역할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어둠의 우두머리를 잡는다고 해도, 다른 채널을 통해 가짜뉴스는 유통될 것이고, 악의적 댓글도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거에 주공이 했던 것처럼, ‘차근차근’, ‘천천히’ 바꿔나가야 할 것이다.

거북이

어떻게 하면 차근차근, 천천히 고쳐나가는 것이 가능할까. 앞서 상전에서 강조한 ‘용회이명(用晦而明)’의 지혜를 적용해야 가능하다. 여기서 ‘어둠’을 쓴다는 것은 곧 ‘밝음’을 쓴다는 거다. 구삼효에서 ‘밝은 빛이 손상될 때 남쪽으로 사냥간다(明夷于南狩)’고 했는데, 여기서 ‘남쪽’은 ‘밝은 곳’ 혹은 ‘밝음’을 뜻한다. 보통 어둡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면, 반사적으로 대응하기 마련이다. 보복과 복수, 우울과 비탄 등의 단어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명이괘 구삼효는 ‘밝은 곳으로 나아가라’고, 어둠은 밝음으로 대응하라고 말한다. 가짜뉴스를 접할 때마다, 폭력적인 댓글을 대할 때마다 일일이 분노하고 응징하려 든다면, 옳고 그름이라는 ‘시비’에 갇히기 쉽다. 그렇기에 진짜 어둠은 흑백논리에 빠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답이 없다. 명이괘에서 말하는 어둠은 나쁜 것, 틀린 것을 말하지 않는다. 밝음이 상한 것(傷)을 뜻한다. 그래서 명이의 시대에는 ‘밝음’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에 대해 포인트를 두어야 한다.

사실, 언론현실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뾰족한 수’라는 것은 없다. 그렇기에 뾰족한 ‘방법’을 찾아내는 데 집중하기 보다는,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 태도가 ‘어둠에 잠식되지 말자’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되 어둠에 반쯤 눈을 감고, 밝음을 지켜내는 것에 주력하는 것. 유리옥에 갇혀 주역의 지혜를 보존했던 문왕이 그랬고(文王以之), 주왕의 폭정에도 불구하고 홍범구주를 지켜낸 기자가(箕子以之) 그랬다. 이들은 어둠의 시기에 ‘지혜’를 보존하는 것으로써 밝음을 지켜냈다. 문왕은 유리옥에 자신을 가둔 주왕을 원망하며 복수심을 키우지 않았다. 기자도 미친 사람 흉내를 내야했지만 그 상황을 부정하지 않았다. 시대가 엄혹하다고 해서 그 시대와 불화하는 것이 아니라 밝음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살아냈던 것이다. 그렇게 지켜낸 지혜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은가. 어둠에 물들지 않는 것이 곧 밝음을 지켜내는 힘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천천히 고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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