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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사용 설명서] 종교도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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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03-03 21:10 조회1,2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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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도 삶이다

안 상 헌(감이당)

인간은 늘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의 삶에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작용하기에 이 불안과 두려움은 필연적으로 있게 마련이다. 이 필연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은 늘 큰 가르침을 찾았고, 종교가 그 역할을 다해줄 것을 염원한다.

인간은 ‘종교적 본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그 내면에 종교적인 체험과 갈망이 늘 있게 마련이다. ‘종교적 본성’이 어떻게 발현되는가의 문제는 개인의 삶을 넘어 공동체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지혜를 가르쳐야 할 종교가 세상을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그 외 크고 작은 일로 세상을 더 힘들게 하는 경우도 많다. 지금 우리 사회가 딱 그렇다. ‘코로나19’라는 최대의 위기 속에서 모든 국민이 이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일부 집단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보이는 행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그렇지 않고 극소수의 문제라고 이해하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넘어가기엔 이들이 일으키는 문제가 심각하고 반복적이다. 니체를 빌어 오늘의 ‘종교’를 말해보자.

종교에 대해서도 심한 검산을 하고 그 엄청난 위험성을 밝혀야 할 것이다.만일 종교가 철학자의 손안에 있는 육성의 수단과 교육의 수단이 아니라그 스스로 절대 권한으로 군림한다면만일 종교가 다른 수단들과 병립해 있는 수단이 아니고 그 자체로 궁극적인 목적이고자 한다면이는 언제나 비싸고 무서운 대가를 치르게 된다.(니체선악의 저편책세상, 101)

종교가 절대 권한이 되고, 자기 종교 이외에 다른 어떤 것들도 인정하지 않는 데에 따른 대가는 늘 비싸고 무거웠다. 특히 서구 사회의 경우 많은 전쟁이 종교적 이유에서 치러졌다.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종교를 철학적 사유의 범위 안에, 즉 삶의 범위 안에 포함하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위험하게 만드는 집단들이 있다. ‘신천지’, ‘사랑제일교회’, ‘BTJ 열방센터’, ‘IM선교회’ 등. 이들의 공통점은 이렇게 요약해 볼 수 있겠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코로나의 대유행을 촉발시킨 집단들. 특정 종교 단체들, 하지만 정통 교단의 통제를 벗어난 그들만의 집단. 이들은 왜 이렇게 우리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가? 이들은 왜 이렇게 사회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수칙들을 지키지 않는가? 때로는 의도적으로 기본 수칙을 어기기도 한다. 때로는 근거 없는 자신감, 아니 오만한 자신감을 보이기도 한다. 이들은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이러는 것일까?

혼돈이들은 왜 이렇게 우리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가?

이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 있다. 우선 이들에게는 ‘우리는 절대 안 걸린다’라는 교만함이 넘친다. 이들의 교만함은 ‘절대 권한자로 군림’하는 특정인에게서 나와 이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전파된다. 예를 들어, ‘자신의 성전에서는 절대 감염이 안 된다.’ ‘자기가 이끄는 예배에서는 감염이 안 되니 안심하라, 그리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다가 코로나에 걸리는 것은 축복이다.’ ‘우리에게는 집합 금지 같은 수칙은 필요 없다. 그러니 모두 스마트폰은 끄고 모여라.’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여러 번 설교했지만 아직 한 명도 안 걸렸다,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를 코로나로부터 과학적으로 지켜주신다.’ 등등. 이렇게 누군가 말이 안 되는 말을 하고, 그 말을 사람들이 믿고 따른다. 이들은 자기들끼리 절대 권한이 되어갔고,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말에는 귀를 막고 살아간다. 그럴수록 이들 안에서 소수의 권한은 절대적인 힘을 갖게 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이들은 어느 순간 스스로를 돌아볼 눈도,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살펴볼 생각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교만함에서 시작한 맹신은 오직! 스스로가 세운 망상만을 붙들고 살아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들도 ‘사랑과 자비’를 말하지만, 그 사랑과 자비는 출발부터 잘못되었다.

니체는 이들을 향해 경고한다. 세상에는 교만한 자에게까지 선물해도 될 정도로 사랑과 자비가 충분하지 않다.”(니체, 『인간적 Ⅰ』, 책세상, 144) 그렇다! 코로나가 잘 걸리지 않는 것은 자기 몸에 면역력이 강해서이고, 지켜야할 수칙을 잘 지켜서이지 그 외 다른 어떤 이유도 없다. 그것은 의학이고 과학이다. 신이 베푸는 ‘사랑과 자비’ 또한 이 의학과 과학을 벗어나지 않는다. 코로나19라는 엄중한 상황에서 개인의 생명을 위해, 크든 작든 공동체의 안전과 생명을 위해 지켜야할 것을 잘 지키는 자에게 내리는 것이 신의 사랑이고 자비이다. 하지만 종교의 이름으로 교만함에 빠진 자들은 이를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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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확신에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또 다른 공통점으로 이들은 스스로 ‘예감 능력’을 자랑한다. 이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보는 눈 모두를 가졌다고 자랑한다. 이들은 마치 바이러스가 자신들을 피해가는 것을 본 듯이 말한다. 실제론 이들은 수칙을 잘 지키지 않기에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매우 해로운 결과를 낳는다.

예감은 확실성의 나라에 한 걸음도 들어서지 못한다. (사람들은 단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즉 행복하게 하는 것이 또한 참이기를 바라는 내적 바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이 소망이 우리들로 하여금 나쁜 근거를 올바른 근거로 받아들이도록 유혹하는 것이다.”(니체위의 책, 146)

종교적 확신으로 가득 찬 사람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예감 능력’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이들은 어려운 삶의 현실에서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내적 바람’을 악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이들은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힘들어하는 취업 문제, 중년들이 갈구하는 안정된 수익, 자녀들의 대학 진학 문제 등을 파고들어 자신들이 운영하는 곳에 오면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결될 수 있다고 유혹한다. 어려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각자의 소망이 강할수록 ‘나쁜 근거’를 맹목적으로 믿게 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이들은 결국 스스로를 보는 눈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삶을 성찰할 힘을 키우지 못한다. 이들이 믿고 있는 것은 배고픔은 그를 배부르게 해줄 음식물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단지 음식물을 원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니체, 『위의 책』, 145-146)라는 기본적인 생리학적 사실을 알지 못하는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들은 모든 것을 생각만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들이 바라는 것들은 생각이라는 틀 안에서는 모두가 가능하다. 그러니 생각의 틀을 좁힐수록 ‘예감’은 더욱 분명해지며 자신들이 바라기만 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다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다. 이들은 행복의 나라를 상상하면서 모이고 또 모인다. 이들은 소리높여 기도하고 그 소리가 높아질수록 ‘예감’은 더욱 확신에 차오른다. 하지만 불행인 것은 이 예감이 확실해질수록 삶에 꼭 필요한 감각들은 무뎌지고 있다는 데에 있다.

손뻗기이들은 소리높여 기도하고 그 소리가 높아질수록 ‘예감’은 더욱 확신에 차오른다.

‘교만함’과 ‘터무니없는 자신감’(예감능력)은 삶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한다. 삶에 무뎌진 감각이 이들을 어디로 이끄는 것인가는 앞의 사례들이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인간은 ‘종교적 본성’을 버릴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삶에 무뎌진 이 종교적 감각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종교도 인간의 삶을 위해 인간이 만들어온 것이기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다시 삶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그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신의 사랑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그가 은총과 구원의 서곡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자기 은총이요 자기 구원이다.(니체위의 책, 151)

니체는 신의 사랑은 근본적으로 ‘자기 사랑’, ‘자기 은총’, ‘자기 구원’임을 강조한다. 한마디로 자기 자신의 구원자가 되는 길! 그것이 ‘신의 사랑’이라는 말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교만함’과 ‘근거없는 자신감’에 삶을 올려놓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우리는 지금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삶에 대한 관점을 바꿔야 한다. 우리는 이제 종교도 삶이다!”라는 새로운 명제를 가질 필요가 있다. 종교야말로 삶의 맥락에서 해석되고 활용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 삶의 철학자가 되어 스스로에게 은총을 주고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 종교적인 것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자기 삶의 은총과 구원을 위한 종교여야 한다. 종교가 자기 은총과 자기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면 이 시대에 그것만큼 필요한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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