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으로서의 인간은 태어나면 숨을 쉬고, 걷고, 말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잡니다. 이런 일들은 평범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것 외에 달리 더 근본적이고 대단하고 신비롭고 위대한 것이 있을까요. 한 생명이 숨을 쉬고 살아갑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니 기적이 있다면 이처럼 살아 숨쉬고 먹고 말하는 것 외에 달리 어느 곳에서 존재할 수 있을까요. <금강경>의 첫 대목은 석가 세존께서 손수 걸식을 하고, 돌아와 밥을 먹고, 손발을 닦고, 자리에 누우셨다… 뭐 이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금강경>은 대승불교 경전 중에서도 손꼽히는 경전인데, 그 어마어마한 경전을 막상 열어보면 이런 얘기가 펼쳐지는 겁니다. 왜일까요.
이 시작을 그저 범상한 이야기로 읽는 사람은 계속해서 <금강경> 다음 대목을 읽어나가면 됩니다. 그러면 이 시작에서 어떤 전율 비슷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면? 그런 사람이라면, 아마 알아서 <금강경> 다음 대목을 읽어나가게 될 겁니다. 하하.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인가 싶으실까요. 깨달음은 별 게 아닌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유별난 어떤 것도 아닙니다. 깨달음이 하학 그 자체냐 물으면 아니라고 말해야겠지만, 어떤 깨달음도 하학을 떠나 있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것은 또한 양명의 유명한 ‘격물(格物)’설의 요체이기도 합니다.
양명의 격물설. 양명에 따르면, 격물의 격(格)은 올바름(혹은 바르게 하다)이라는 의미의 ‘바름’(正)입니다. 바르지 못한 것을 바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때 물(物)이란 우리가 보통 사물, 동물 등으로 말할 때의 그 물이면서 어떤 일을 가리킬 때 쓰는 ‘사건(事)’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각각의 낱낱 물건 등이기도 하고 어떤 행위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무, 휴대폰 같은 것이기도 하고 청소하고 산책하는 등의 일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격물의 의미를 조합해서 풀어보면, 격물이란 사물(혹은 사건)을 바르게 하다는 뜻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