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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클래식] 이 마음이 환히 밝은데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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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06-17 23:32 조회9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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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음이 환히 밝은데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왕양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 슬기로운 유배생활

3부. 슬기로운 유배생활(2) - 용장대오? 용장생활백서

문리스(남산강학원)

(가정 7년 무자) 11월 기묘일선생께서 남안에서 서거하시다.

선생께서 이달 25일 매령(梅嶺)을 넘어 남안부(南安府)에 이르러 배에 올랐다이때 남안 추관(推官)이던 문인 주적(周積)이 뵙기를 요청하였다. 선생께서 일어나 앉았는데 기침이 끊이지 않았다. (선생께서천천히 물으셨다근래 학문의 진척은 어떠한가?” 주적은 정치와 관련된 내용으로 대답하였다주적이 여쭈었다선생님 건강은 어떠하십니까? 선생께서는 병세가 위태하여 아직 죽지 않은 것은 원기(元氣이라고 대답하셨다주적은 물러나 의원을 모시고 와 진찰하고 약을 지어 드렸다.

28일 저녁에 배가 정박했다. 선생께서 물으셨다지금 어디인가?” 모시고 있던 사람이 대답하였다청룡포(靑龍)입니다.

다음날 선생께서 주적을 들어오게 하셨다. 한참만에 눈을 떠 주적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가야겠다.” 주적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무슨 말씀을 남기시겠습니까?” 선생께서 미소를 지으시며 말하였다. “이 마음이 환히 밝은데또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잠시후 눈을 감고 서거하시니 29일 진시(辰時)였다.(<연보>, 57세조)

차심광명, 역부하언(此心光明, 亦復何言). “이 마음이 환히 밝은데, 또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양명의 마지막 장면을 그린 연보에는 사람을 울컥하게 하는 뭔가가 있습니다. 뚜렷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감동적인 일장 연설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보기에 따라선 좀 밋밋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왕양명을 알게된 이래로 저는 이 장면에 이르면 늘 깊은 숨이 한 번쯤 멎는 것 같은 먹먹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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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지막 말씀은 또 어떻습니까? 스승이 돌아가시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제자는 안타깝고 어쩔 줄 몰라 전전긍긍입니다. 위대하고 인자했던 스승의 마지막에 자신 밖에 아무도 없습니다. 다급해진 제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혹시 남기실 말씀이라도….? 후계자는 누구….? <전습록> 저작권은 어떻게…?'(^^) 스승께서 웃지 않으실 수 없게 하려고? 농담입니다. 어쨌든 이 스승께서는 마지막 힘을 다해 한 말씀 하십니다. 희미하게 웃으시면서…. ‘이눔아, 내가 뭘 감춘 게 있을까보냐. 이렇게 마음을 환하게 다 드러내보이며 살았는데…. 무슨 말을 남길 게 있겠느냐?’ 너무 감동적이지 않…게 제가 말해버렸나요?^^

양명의 마지막 장면은 이 자체로도 아름다운 한 편의 이야기이지만, 그 배경을 알게되면 훨씬 감동이 배가됩니다. 먼저 그 이야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양명이 죽은 해는 보셨다시피 가정 8년(1528) 11월 29일입니다. 당연히 음력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쓰는 서기와 양력으로는 대략 1529년 1월에서 2월 사이입니다.(정확하게 양력 언제인지 나중에 좀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대충 인터넷으로 음력/양력 변환기를 이용해볼까 했더니 1900년 이전은 입력이 안됩니다.- -;) 양명은 1508년 봄에 귀주에 용장 역승(驛丞)으로 부임(?)했다가 1510년 봄에 강서성 여릉의 지현(知縣)으로 임염되면서 자동 해배됩니다. 이렇게 보면 양명의 유배생활은 엄밀히 말해 대략 만 2년 정도입니다. 이후 몇 년간 북경과 남경을 오가던 양명은 1516년(정덕 11) 9월에 도 촬원 좌첨도어사 ‘순무남감정장등처’란 직책을 맡게 됩니다. 도 촬원은 명대의 중앙 감찰기구입니다. 순무란 지방의 군사와 정치를 총괄하는 관리인데, 남감정장은 지역명으로 강서성의 남안과 감주, 복건성의 정주와 장주를 가리킵니다. 이 임무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1장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명나라 무종 정덕 연간은 아주 위태로운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현장에서 온갖 민란과 전쟁터를 누벼야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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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과정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고, 여하튼 양명은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소요가 일어나는 곳이면 출병해야 했습니다.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우게 되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정덕 14년(1519)에 있었던 영왕 주신호의 쿠데타 진압입니다. 양명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신건백(新建伯)’이란 작위를 수여받습니다.(소흥에서 조금 떨어진 여요의 양명 사적에 가면 신건백이라고 새겨진 돌로 된 석문이 있습니다. 주신호 쿠데타와 무능한 정덕제 무종 등에 대해서는 앞에서 대략 설명했으니 생략합니다.) 양명은 1521년 가을이 되어서야 겨우 아버지와 가족들이 있는 남경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듬해 봄에 아버지 왕화가 사망합니다.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아버지의 사망 덕분에 양명은 비로소 잠시나마 그를 옭매고 있던 관직으로부터 풀려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수많은 병무(兵務)를 수행하는 중에도 양명은 계속 사직서를 올리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계속 반려됩니다. 다시 말해 부친상 정도가 아니고서는 저 촘촘한 관료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그만큼 쉽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양명의 능력을 시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양명의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겨우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에 양명은 무엇을 했을까요. 양명은 소흥에서 본격적으로 제자들과 강학에 몰두합니다. 양명에게 있어 이 시기는, 용장에서의 깨달음 이후 십 수년간 전국 곳곳에서 현장 강학으로 단련된 학문을 처음으로 평안한 시공간에서 학문적으로 발화했던 시간이기도 합니다. 양명의 고제자 전덕홍에 따르면, 양명에게 배움을 청하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소흥 일대에 하나 둘씩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일대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고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합니다. 거의 매일 배움을 청하는 제자들과 떠나는 제자들을 맞이하고 보내는 일을 쉴 틈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배움을 찾아 먼 데서 벗이 찾아오고, 배움을 중심으로 하나의 마을 공부 공동체가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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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 연보의 마지막이 된 출병은 이와 같은 몇 년 간(가정 원년~가정6년)의 달콤한 강학 생활을 깨뜨린 사건이었습니다. 광서성 전주와 사은 지역의 민란을 토벌하라는 것. 사실 양명은 젊었을 때 말에서 떨어지면서 크게 몸을 다친 이후 늘 양생에 신경을 써야했습니다. 다행히 몇 년간 고향땅에서 마음이 맞는 제자들과 강학하면서 몸도 마음도 크게 회복되고 있었지만, 이미 오십대 중반에 이른 나이를 감안한다면 전쟁터는 그가 견딜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양명은 건강 문제를 이유로 간곡한 사직 상소를 올렸지만, 조정은 끝까지 양명의 출병을 종용합니다. 이 마지막 출병을 준비하며 자신을 찾아온 제자들(전덕홍, 왕용계)과 ‘사구교(四句敎)’ 가르침을 주고, <대학>에 관한 마지막 강학도 이루어집니다.

가정 6년(1527) 9월. 양명은 광서성을 향해 마지막 출병을 떠납니다. 결코 내키지 않는 출병이었습니다. 하지만 양명은 자신의 출병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평생을 길 위에서 야전을 누볐던 사령관이었던 만큼 그에게 매 순간은 늘 마지막이자 한 번뿐인 전쟁터를 맞닥뜨리는 긴장의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매순간 마지막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이번이 마지막길임을 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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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7년(1528) 10월경에 양명은 다시 황제에게 사직 상소문을 올립니다. 이번에는 귀향을 청하는 상소였습니다. 지난 1년간 양명은 어려운 임무였던 전주, 사은 지역의 반란을 모두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병이 재발합니다. 양명은 고향땅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거듭된 요청은 계속 묵살되었습니다.(양명의 요청이 거듭 묵살되었던 배경에는 당시 내각 대신이자 이부 상서였던 계악(桂萼)이란 인물의 농간이 있었습니다). 결국 건강이 악화되면서 더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된 양명은 사직 상소에 대한 대답을 얻기 전에 단독적으로 귀향을 결정합니다. 그러니까 57세 때의 위 연보는, 중앙 관료들의 횡포 및 재발한 병마와 싸우며 귀향하는 중에 양명이 객사하는 마지막 장면인 셈입니다.

 간단히 말한다고 추리고 추렸는데도 좀 장황해지고 말았습니다. 여하간 양명의 최후를 둘러싼 상황은 대충 이러했습니다. 이제 다시 한 번 저 연보의 마지막 장면을 읽어보시면 아마 느낌이 달라지실 겁니다. 목차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슬기로운 유배생활”의 ‘3부 2절’에 와 있습니다. 이번 절의 기본 테마는 ‘관(棺) 속에서 살다’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통해, 양명에게 생사의 문제 혹은 삶과 죽음의 주제가 어떤 것이었을지 말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관은 죽음을 안치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관 속에서 산다는 것은 사실 이상한 말입니다. 죽었는데 살아가고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적 수사로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오늘날에도 사실상 죽은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들은 모자르지 않고 넘쳐납니다. 그런데 양명에게 이 말은 수사가 아닙니다. 용장에서 실제로 양명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럼 그 당시 양명은 스스로 죽은 목숨으로 생각하고 살았다는 뜻일까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용장과 양명의 처지를 극단적인 바닥의 상황으로 보는 입장일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양명이 죽음과 삶이라는 두 개의 대립적일 뿐인 구도를 ‘살아감(살다)’의 유일하고 현재적이고 동사(용법)적인 문제로 바꾸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죽음과 삶이 아닙니다. ‘살다’, ‘살아감’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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